누가 나한테 로봇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뭐 인공지능 포함이냐니 그렇다고 한다. 뭐 여러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대답을 한다. ‘공각기동대랑 같은 생각을 해’. 상대는 공각기동대를 아쉽게도 보지 않았기에 말이 길어지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를 매번 반복하기 싫어서 글로 남긴다.
우리는 여러 층위와 방향에서 기존의 ‘우리’라는 경계에 대한 위협을 받고 있다. 지식 생산, 정리, 메타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 같이 인간에게만 부여된 것처럼 보였고 그 어떤 인간 이외의 동물들이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묻던 MS워드의 멍멍이가 그 독점적 권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 했다. 하지만 지식을 기억하고 저정하는 매체가 뇌와 책에서 컴퓨터로 이전되게 됐고, 어느새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기억 저장소에 의존하게 되면서 뇌로 무언가를 기억할 필요 없이 단순 키워드 형식으로 단편적인 정보를 기억한 후에 인터넷에서 기억을 꺼내쓰고 있다. 이 말을 들으면 바로 공감이 가지 않는가? 무언가를 기억하려는 의지가 되게 약해지지 않았나? 상식 퀴즈 쇼에 이제 누가 관심이 있는가? 어디 여행에 대한 기억은 폰에 남은 사진에 종속되지 않는가? 폰에 사진으로 안 남은 순간들이 잘 기억나는가? 더 나아가 ChatGPT 시대에는 몇개 키워드와 문장만 던져주고 나오는 결과를 보고서, 논문, 기획서 등등 모든 곳에 복붙하고 자신의 의견인 양 말하는 시대에 이르른다. 유한하고 연약한 우리의 몸은 점점 기계에 도움을 받기 시작하고 사이보그가 그렇게 먼 미래의 일은 아닐 것이다. 지구의 종속됐던 인간은 어느새 지구를 떠나려고 한다. 요원해 보였던 로봇의 정밀 제어는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했고 큰 병원의 다빈치 시스템은 대놓고 로봇에 인간을 대체하여 수술하는 이미지를 그려낸다. 생명의 비밀처럼 여겨지던 DNA는 어느새 개복제를 넘어서 DNA 조작을 통한 종 개량을 하는 수준이 도달했다.
우리의 인간성이라는 경계선은 마치 태풍을 앞둔 해안선과 같은 꼴인데 우리는 이 거대한 변화(혹은 위협?)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그저 영혼, DNA, 겉보기에 인간이라는 그 자체에 집착하고 나머지를 배제할 것인가? Gut, Soul, Ghost 같은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인 영혼이 있는가 없는가를 따질 것인가? 어째 내가 뭘 말을 아직 주장하지도 않았는데 영혼 같은 말들이 궁색하게 느껴지지는 않는가?
한가지 확실한 것부터 밝혀가야한다. 카진스키가 주장했듯 산업사회의 기술적 진보는 절대 막을 수 없다. 기술적 진보는 인간이 이루는 것이지만 인간의 의지가 아닌 산업사회 시스템의 의지에 종속된다. 이 시스템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도덕? 행복? 인간성? 몰루? 당장 IBM이 수천명을 짜르겠다고 말하고 벌써 수백명을 짤랐는데 IBM의 인공지능 팀은 구글, OpenAI 보다 더 좋은 인공지능 개발하기 바쁘고, 인공지능 워크로드를 연산하는 데이터 센터 인프라 연구를 하기 바쁘다. 이건 못 멈춘다. 우리가 고민할 선택지 중에 적어도 어떻게 막을 것인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다시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계속 그런 뉴스 기사가 뜬다. GPT4한테 연구자들이 이런 저런 질문을 하면서 사람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튜링테스트를 해보았으나 그 어떠한 연구자도 인간과 인공지능을 구분하지 못 했다니 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다들 인공지능과 우리를 구분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계속 질문은 인간-기계 사이에 경계 분명하게 긋고 싶은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마음 깊숙한 곳에는 고유한 인간성이 훼손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나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두려워하고 있다.
공각기동대 속의 주인공들도 그렇다. 근미래에 신체의 80% 이상(수치가 기억 안남)이 사이보그화 되고 뇌는 전뇌화 되어서 생각만으로 컴퓨터를 조작하고 인터넷을 접속할 수 있는 ‘인간’들은 모든 생활 전반에 ‘비인간적’인 기술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기계와 인공지능에 둘러쌓인 자기 자신에 대해 지속적으로 질문을 한다. 나는 인간인가? 내 영혼이라는 건? 지금 내 앞에 있는 의체와 나는 무엇이 다르지? 나라는 건 허상이 아닐까? 주인공 옆에 등장인물이 주인공에게 조언해준다. 의식이 허상일지라도 나의 두뇌가 있기에 남과 구분하는 자신 일 수 있다고. 주인공은 다시 말한다. ‘자신의 뇌를 본 인간따윈 없어”.
영화 속 사건이 전개되면서 고도의 인공지능이 자신이 생명체임을 주장하며 망명을 신청한다. 아래가 인공지능과 등장인물 간의 대화이다.
인공지능 : … 여기 이렇게 있는 건 나 자신의 의사다. 하나의 생명체로서 정치적 망명을 신청한다. 등장인물 : 생명체라고? 말도 안 돼! 단순한 자기 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아! 인공지능 : ‘그렇게 말한다면 당신들의 DNA 또한 자기 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이란 정보의 흐름 속에서 태어난 결접점과 같은 것이다. 종으로서의 생명은 유전자라는 기억 시스템을 가지고 사람은 오직 기억으로 인해 개인일 수 있다. 설령 기억이 환상과 동의어라고 해도 인간은 기억에 의해 살아간다. 컴퓨터의 보급이 기억의 외부화를 가능하게 했을 때 당신들을 그 의미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했어야 했다.’ 등장인물 : 궤변이다!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네가 생명체인 증거는 하나도 없다! 인공지능 :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대화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나?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공감이 갔나? 인공지능의 주장에 아득함을 느꼈나? 거부감을 느꼈나?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인간이라고 여기는 것들은 우리 인간들이 인간적이라고 믿었던 것에 불과하다. 영화에 끝에서 인간성에 대해 고민하던 주인공은 위의 인공지능과 결합하여 새로운 인류 재탄생한다. 그러고 고린도전서의 말을 읊는다 ‘내가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신인류(?) 아니 새로운 생명체이자 종은 도시가 내려다 보이는 절벽에 서서 ‘네트는 광대해’라고 외치며 인간의 세계에 뛰어들어 자유롭게 넘나들 것을 암시하며 영화는 끝난다.
변화는 피할 수 없고 인간성이라는 건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이다. 그리고 이 인간성이라는 것은 계속 변해왔다. 기술이 변하면서 인간 관계(사랑, 결혼, 친구)가 바뀌고 시간을 쓰는 방식이 변하고(토요일 휴무, 플레시블 타임, 워라벨), 내가 서있는 땅과의 관계가 변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명의 가치 또한 변한다. 삼국지 시대에 몇만명 씩 죽어나가던 인간과 지금의 인간이 같지는 않고 인터넷 이전의 인간과 지금의 인간이 같지 않다. 인간성은 인간-세계와의 상호관계가 달라지면서 계속 변하고 있고 지금 그 변화의 중심인 기술이 인간성을 완전히 바꾸고 있다. 위의 고린도전서의 말처럼 우리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고,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이 살면서 예전의 인간이랑 지금의 인간이랑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경계선은 두 세계가 만나는 지점이다. 눈으로 보이는 나와 나 이외의 것의 경계는 명확해보인다. 지금 당장 눈으로 보이고 몸으로 느껴지는 육체가 그 경계선이다. 근데 내 눈이 세상과 닿는 접면과 실제 작용이 일어나는 접면은 이제 아득하게 멀어졌다. 여러분들은 눈과 손을 가지고 핸드폰에 투닥투닥 구글에 고양이 사진 검색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 줄 아는가? 아주아주아주 과장하고 로맨틱하게 말해서 그 한번의 검색 과정에서 전지구가 변한다. 농경 시절에 삽으로 땅을 팔 때 미치는 영향력과는 그 규모가 완전 다르다. 나를 규정하는게 명명백백하게 보이고 단단하게 물질화된 내 육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육체가 세상과 만나는 방식은 완전히 달라졌다. 경계선은 언제나처럼 변해가고 있었고 우리는 그걸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이다.
고정된 인간성 같은건 깔끔하게 잊어버리자. 우리의 몸을 육체로 한정 짓지말자. 도구도 우리의 몸의 연장이다. 우리는 짧은 30년 사이에 어마어마하게 변했고 앞으로 더 빠른 시간 안에 급격하게 변할 것이다. 더이상 구분짓기는 의미없다. 구분 짓는다고 멈출 수 있는 것도 없고 달라지는 것도 없다. 피할 수 없으니 즐기자! 인터넷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의식, 팔다리를 잃어도 걷고 뜨개질 할 수 있는 의체, 우주복을 입지 않고 화성을 뛰어다닐 수 있는 육체라니 생각만 해도 즐겁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