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정말 간만에 하루키 소설을 읽었다. 스포가 있으니 주의하시길

소설 전개

학창시절에 나고야에 살던 다자키 쓰쿠루는 고등학교 때 4명의 친구들과 함께 뜨거운 우정을 나누었으나, 20살에 쓰쿠루 혼자만 나고야를 떠나 도쿄에 대학에 진학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들이 어떤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절연을 선고한다. 쓰쿠루는 이의를 제기하지도 못한 채 절연 선고를 받아들이고 가슴의 상처를 안고서 16년을 살게 된다.

16년의 시간은 가슴의 상처에 먼지가 쌓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고 36세의 쓰쿠루는 겉으로 보기에 건실한 직장인의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친구라고 부를 존재도 없고 고독을 느끼지만 친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몇 번의 연애를 했지만 결혼을 하지는 않았다. 기회가 되면 결혼을 하겠다고 생각하지만 이성과의 만남은 결혼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쓰쿠루는 최근에 만난 사라와 관계가 깊어지는 와중에 그는 16년 간 남에게 한번도 말하지 않았던 16년 전의 일방적 절연의 상처를 사라에게 말한다. 이야기를 들은 사라는 자신도 쓰쿠루에게서 묘하게 느껴지는 공허함, 거리감을 말하며 관계를 지속성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와 동시에 자신과 만나고 싶으면 이제 묻어뒀던 상처를 직접 들추기 위해 그때 4명의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해보라고 한다.

쓰쿠루는 진실을 알기 위해,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사라와의 관계를 위해 순례의 길을 떠난다.

상처냐 기질이냐

인연이 끊긴 학창시절 4명의 친구는 이름에 적(아카), 청(아오), 흑(구로), 백(시로)의 색깔 한자가 있었고 그들의 개성도 이름과 걸맞는 색이 있었다. 하지만 ‘만들다’라는 뜻을 가진 쓰쿠루의 이름에는 색깔이 없었고 쓰쿠루는 이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개성에도 색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색이 없는 무미건조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학창시절에 친구들과 교우를 할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다.

쓰쿠루는 관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람에게 다가가지도 자신을 표현하지도 않는 자신의 무색의 성격은 학창시절의 상처 때문이라고 생긴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옛 친구들을 만나는 순례의 과정에서 만난 옛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자신의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소리를 듣는다.

아오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너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어. 너는 그 당시 우리 다섯 명 중에서 가장 어른스럽고 침착했어. (...) 나나 아카보다 훨씬 심지가 굳고 남자답다고 생각했지.

너는 내가 아는 누구보다도 튼튼하고 냉철하게 땅에 발을 붙이고 산다는 인상을 주었거든. 감정에 휩쓸리지도 않고

만약 내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나는 상대를 철저하게 때려눕혔을 거야. (...) 그런데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변명도 하지 않고 화도 내지 않았지. 그저 조용히 우리 앞에서 모습을 감췄어. 그게 나에게는 꽤 쇼크였어. 너의 그 깊은 침묵이.

아카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너는 잘 몰랐겠지만, 우리 그룹은 아슬아슬한 균형 위에 성립되어 있었어. (...) 너는 말하자면 배의 닻 같은 존재였어. 네가 없었다면 우리 네 사람은 뿔뿔이 흩어졌을지도 몰라.

너에게는 사람을 안심시키는 무언가가 있었어. 너는 남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었고, 적절한 말을 골라 썼어. 그건 아주 중요한 재능이야.

구로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거 알아? 난 다자키 쓰쿠루, 너를 좋아했어. (...) 시로도 아오도 아카도 좋아했지만, 이성으로서 마음이 끌린 건 너뿐이었어.

너는 텅 비지 않았어. 절대로. 너에게는 너만의 색이 있어. (...) 훌륭한 역을 만들어, 쓰쿠루.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너만의 역을.

너는 멋진 색채가 가득한 다자키 쓰쿠루야. 멋진 역을 만드는 다자키 쓰쿠루야. 지금은 아무것도 없어도 좋아. 힘껏 몸을 웅크리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면 돼.

아오는 쓰쿠루의 침묵을 침착하고 강인한 정신으로 읽었고, 아카는 쓰쿠루의 소극적 자기표현과 인간관계를 안정감으로 읽었고, 구로는 쓰쿠루의 무색무취한 성향을 투명한 아름다움으로 느꼈으며 심지어 그를 사랑했다고 말한다.

심지어 독자들도 쓰쿠루의 매력을 잘 알고 있다. 437 페이지의 꽤나 긴 장편 소설을 단숨에 읽는데에는 소설의 흥미로운 플롯 뿐만 아니라, 쓰쿠루의 다정하고 섬세한 세계관과 그 세계관에서 나오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표현들이 큰 역할을 했다.

소설은 3인칭 전지적 시점이지만 아래는 쓰쿠루 만의 표현들이다.

분노는 진득한 액이 되어 골수에서 빠져나와 끈적하게 흘렀다. 폐는 미쳐 버린 한 쌍의 풀무가 되었고, 심장은 액셀러레이터를 끝까지 밟은 엔진처럼 회전수를 올렸다. 그러고는 들끊는 검은 피를 몸 구석구석까지 흘려보냈다.

따스한 피가 흐르고 아직도 조용히 맥박 치는 인연의 끈을 날카롭고 소리 없는 손도끼로 싹둑 잘라 버리는 것처럼.

질투란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감옥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인이 스스로 옥문을 잠그고 열쇠를 철창 밖으로 던져버린 감옥이기 때문이다.

(절연 후 몸과 마음이 망가진 쓰쿠루를 걱정하는 엄마에게) "이런 건 내 나이 때에 자연스러운 변화일 뿐이고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변한 몸에 맞는 새 옷 몇 벌이야"

(구로의 도자기 작품을 보며) 전체적으로 두툼하니 육감적이고 테두리의 선이 미묘하게 뒤틀렸으며 세련되고 예리한 아름다움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에는 사람의 마음을 신비롭고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맛이 있었다. 살짝 깨어진 균형이, 거칠거칠한 감촉이, 자연 소재의 천을 만지듯, 마루에 앉아 하늘에 흐르는구름을 바라볼 떄처럼 조용한 안정감을 가져다 주었다. (...) 쓰쿠루는 그 문양이 하나하나 무엇을 나타내는지 확인하기 위해 눈을 가까이 대 보았지만 형상의 의미는 알아낼 수 없었다. 이상한 도형이었다. 그러나 조금 거리를 두고 바라보니 숲 바닥에 이리저리 흩어진 나뭇잎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름 모를 동물들이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은밀히 소리도 없이 살며시 밟고 가는 나뭇잎이다.

쓰쿠루는 상처를 안고 고독하게 혼자 살아왔지만 그는 그의 내면을 외면하지 않았다. 자신이 느끼는 고통을 마주했고 그는 자신의 몸에 흐르는 피의 뜨거움을 느껴왔다.

질투에 대한 표현에서는 그의 사색의 깊이가 느껴진다.

20살 몸과 마음이 망가진 절박한 상황에서 어머니의 걱정에 방어적 감정을 가지고 대응하기 보다는 의연하게 자신의 상황을 전달하는 모습에서는 강인함이 느껴진다.

그의 표현들은 섬세하고 서정적이지만 한편으로 공대남스러운 비유들이 눈에 띄는데 그는 그 자신이 딱딱하고 재미없는 공대남이라고 여기지만 옆에서 보기에 그의 비유는 참신하고 매력적이다.

또한 도자기의 미를 감상하는 모습에서는 보통 사람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심미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

재미있는 사실은 쓰쿠루의 감각적 표현들이 대부분 전지적 작가의 입을 빌린 내면 서술로 나타나지 입 밖으로 발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쓰쿠루는 자신의 차분하지만 매력적인 색을 꽁꽁 숨겨놓으면서 자신이 무색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거다. 주변인들은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쓰쿠루의 매력을 느껴왔지만 쓰쿠루 자신만이 자신의 매력을 알지 못했다.

이쯤오니 헷갈린다. 그가 고독하게 세상과 거리감을 두고 살아갔던 건 단지 상처 때문이었을까? 상처 받기 이전 학창 시절에도 자신이 친구들 그룹에서 색이 없이 동떨어졌다고 느꼈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고독이 어쩌면 그의 타고난 기질에서 온 자발적 고독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연약했던 사춘기에 안정적 교유관계를 통해 자아가 성숙되기 전에 받는 큰 상처가 지금의 쓰쿠루를 만들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서도 말이다.

힘 빠지는 후반부, 이해될 필요 없는 이야기

순례 중에 만난 옛 친구 아오, 아카, 구로 세 명의 말을 옮겼지만 왜 시로의 말을 옮기지 않았냐 궁금할 지 모르겠다. 시로를 이미 6년 전에 죽어 더이상 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쓰쿠루는 아오, 아카, 구로 각자를 만나며 그때 절연의 진상을 듣게 된다. 황당하게도 그때 시로는 자신이 쓰쿠루에게 강간 당했다고 말하며 심적 고통을 호소했고, 고통스러워하는 시로를 외면할 수 없는 세 친구들은 시로를 위해 쓰쿠루를 잘라낼 수 밖에 없었다. 평소의 쓰쿠루가 강간 같은 행동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을 친구들은 알고 있었기에 시로의 말을 믿었던 건 아니지만 시로가 매우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에 친구들은 어떤 행동이든 취할 수 밖에 없었고 혼자 도쿄로 가버린 쓰쿠루를 잘라버리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쉽게도 시로는 20대 내내 악령처럼 달라붙은 마음에 병을 못이겨 시들어가다가 혼자 나고야에서 떨어진 하마마치에서 목이 졸려 살해 당한 채 발견된다.

소설은 설명되지 않은 절연의 진실을 찾기 위한 쓰쿠루의 순례를 따라가며 긴장감을 높이지만 소설에 끝에 가서도 시로가 왜 쓰쿠루가 강간을 했다는 누명을 씌었는데, 어떤 경위로 살해 당했는지 전혀 밝히지 않는다. 사실관계에 대해 암시 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 어떠한 설명 없이 끝나버리는 전개에 맥이 빠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한편으로 영원히 알 수 없는 진실이 마음 깊게 남기도 한다.

추리 소설에서의 살인는 범행의 동기와 방법이 무조건 밝혀져야 하지만 현실에서의 살인 꼭 그렇게 진실이 밝혀지지는 않는다. ‘아니 그래도 소설인데 찝찝하게 끝낼 수는 없지’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는 사실 시로가 죽은 이유를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

순례 과정에서 밝혀지길 시로는 쓰쿠루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실제로 강간을 당했으며 강간 과정에서 임신을 했다. 이전부터 낙태를 반대했던 시로는 강간 당해 생긴 아이라도 낳으려고 했으나 유산을 했다. 시로의 정신은 강간 이후 오래도록 위태로웠으며 연주를 즐겼던 피아노도 전공, 그리고 업으로 삼으니 자신의 재능의 한계를 느끼고 고통 받는다. 그녀는 시름시름 앓다가 시들어버렸고 그녀의 생명력이 다해버렸던 것이다.

여전히 그녀의 거짓말과 살해의 진실은 알 수 없지만 그녀가 거짓말에서 그녀의 불안정한 정신으로 이해할 수 있고, 그녀가 살해 당하지 않았더라도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죽음이라는게 그렇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그 영원한 침묵의 강 너머에 다가설 수 없다. 산 자들이 스틱스 강 앞에서 느끼는 막막함이 전해지는 소설의 결말이 슬프지만 공감이 가기도 한다.

오히려 아쉬웠던 부분은 소설 마지막 장에서 길게 이어지는 쓰쿠루의 내적 독백이다. 쓰쿠루는 자신이 ‘가야할 장소가 없이’ 그 자리를 지키며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기차)역’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이런 저런 내적 독백을 하는데 이 부분이 조금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입 밖으로 표현하지 않는 쓰쿠루 성향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쓰쿠루가 순례를 거치고 마음의 상처를 회복했다고 느끼기는 어려웠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의심하며 자신을 삼켰고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마지막 장에서 그에게 필요했던건 말과 행동이었다. 독자들은 쓰쿠루가 원래 남들과 거리를 느끼는 고독한 기질을 가지고 있는 걸 알고 있다. 단지 어릴 적 친구들과의 절연에서 온 상처가 성장의 시간을 멈추었을 뿐 츠쿠루가 조금만 마음을 열어도 세상이 그를 반겨줄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새벽 4시에 사랑하는 사라에게 전화해 자신을 감정을 토로하는 모습을 보며 그의 마음이 열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쓰쿠루가 조금 더 극적인 행동을 하는 모습을 난 기다렸다.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

친구가 정경화 바이올리니스트의 공연을 보고 온 후기를 전해줬다.

‘분명 공연장 설계과 잘된 롯데 콘서트홀에 좋은 좌석에 앉았지만 (피아노, 바이올린) 듀오 공연이어서 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래서 집중이 안 됐는데 옆자리 어린 친구는 공연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친구는 ‘이어폰, 대형 사운드 시스템의 강한 음압에 길들여져서 작은 소리를 듣는 집중력이 흐려졌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나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믹싱과 마스터링의 과정이 들어간 소리와 실황의 소리는 완전히 다른거구나

뭐 또 뻔한 소리하냐고? 조금만 참고 따라와주길.

Mozart - Symphony No.25

클래식을 그다지 듣지 않고 특히 모자르트는 잘 안 듣는 편이지만 모차르트의 교향곡 25번은 종종 듣고는 한다. 모차르트가 너무 드라마퀸처럼 느껴져서 잘 안 듣는데, 가끔 드라마퀸이 되고 싶을 때는 이만한 곡이 없다.

곡 처음부터 강하고 빠르게 내리쬐는 스트링 사운드를 특히나 좋아하는데 친구의 정경화씨 공연 후기를 듣고나니 궁금해졌다. 난 대부분의 경우 이 곡을 이어폰 볼륨 최대로 들어왔는데 이 곡의 실황을 들었을 때 똑같은 경험이 전해질까?

물론 좋은 공연장의 좋은 자리에서 듣는다면 충분한 음압이 전해지겠지만, 홀에서 내가 이 곡에서 좋아하는 자극적으로 귀를 찌르는 스트링 소리가 전해지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공연을 가본 적 없어서 모른다)

Chet Baker

믹싱, 마스터링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중요성을 전달하기에는 쳇 베이커 곡들이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쳇 베이커의 곡들을 보컬은 매우 가까이 서서 귀에 속삭이듯 들린다. 기술적으로 간단히만 말하면 마이크를 거의 입술에 닿을 정도로 가깝게 위치시켜 보컬의 숨소리까지 들린 정도로 녹음을 했고, 믹싱에서 보컬의 음압을 상대적으로 높여 보컬이 강조되도록 하여 그렇게 들리는거다. (다른 이유들도 더 있지만,,,)

쳇 베이커의 ‘귀 옆에서 부르는 듯한 보컬’은 사실 음향 시스템의 변화와 관련이 깊다. 1950년대에 미국 가정에 전축이 보급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제 소리를 거실에서 즐길 수 있게 됐다. 시끄러운 소음이 가득한 재즈 공연장에서 쳇 베이커의 힘 없는 목소리는 웅얼거리는 모기 같을 지 모르겠으나, 조용한 거실의 안락한 소파 기대어 그의 목소리를 귀 옆에서 들으면 따듯하고 서정적으로 들렸던거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을 해보자. 쳇 베이커의 ‘스튜디오 곡’과 ‘라이브 곡’은 같은 곡일까? (물론 라이브에도 많은 사운드 엔지니어링이 들어간다)

조니 그린우드의 OST

이번 PTA의 영화에도 조니 그린우드가 곡으로 참여했다.

영화 극 초반부에 나오는 OST인데 25초 쯤부터 나오는 강렬한 스트링 소리는 온 몸을 긴장하게 하는 동시에 짜릿한 쾌감을 주는데 그 느낌이 THX Note를 연상시킨다. (볼륨을 최대로 해서 듣자)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곡이었기에 일상에서도 종종 듣고는 했는데 마침 모차르트 생각을 하기 전에도 이 곡을 들었다보니 연관지어 생각하게 됐다.

확신이 든다. 이 곡을 영화관에서 듣는 것과 라이브 공연에서 듣는 건 완전히 다를 것이다.

생각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귀에 들리는 이 스트링 소리는 사실 가상의 악기 소리가 아닐까?

인터넷에 간단한 검색만 해봐도 London Contemporary Orchestra가 연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무슨 헛소리냐?

창작자는 곡이 극장 스피커, 그리고 개봉 이후에는 이어폰을 통해서 듣는 것을 대상으로 믹스/마스터링을 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EQ, 패닝, 컴프레서, 리버브 등등의 수많은 후처리를 거쳐 소리에 자신이 원하는 의도를 담았다. 아까 모차르트와 마찬가지로 이어폰에서 재생되는 후처리를 거친 스트링 소리는 청취자에게 분명 다른 음악적 경험을 줄 것이다.

다르게 이야기해보자.

한때 유행했던 Slowed + Reverb 중 가장 유명한 The Caretaker - It’s just a burning memory와 원곡인 Al Bowlly - Heartaches가 같은 곡인가? 당연 다른 곡이다.

그러면 케어테이커의 곡의 리드/브라스 소리가 과연 현실 악기의 소리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정도까지와서는 현실의 악기 소리라고 부르기 어려워진다.

어디까지를 현실의 악기 소리라 부르고, 어디까지를 악기에서 벗어난 소리라고 부를 지 고민하지말자. 그냥 소리의 차이에 집중해보자

연주자는 악기를 연주할 때 아주 사소한 소리 변화까지 신경써서 소리에 자신의 표현 의도를 담으려고 한다.

프로듀서와 사운드 엔지니어도 믹싱/마스터링을 할 때 아주 사소한 소리 변화까지 신경써서 소리에 자신의 표현 의도를 담으려고 한다. 다시말해 믹싱/마스터링은 또다른 형태의 연주인거다.

같지만 다른 반복

Bruce Brubaker가 Brian Eno의 Music for Airports를 연주한 곡을 들어보자.

원곡 보다 훨씬 강렬한 저음이 온 몸을 감싸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이노의 곡이 공항에 엠비언트로 깔려 마음을 편안하게 하지만 언제든 옆에 사람과 대화를 해도 될 정도로 가볍게 들리지만 브루버커의 곡은 앞서 쳇 베이커처럼 조용한 개인 공간에서 온전히 집중해서 즐기기 위한 곡으로 들린다.

브루버커의 곡은 소리도 훨씬 절제되어있다. 이노의 곡은 테이프 특유의 묘하게 떨리는 음정이 사운드를 다채롭게 했다면 브루버커의 곡은 피아노의 떨림 만을 귀로 전달한다. 순수한 그 피아노의 떨림에 집중하다 보면 마치 피아노 속에 들어간 기분이 든다.

브루버커의 연주는 같은 노트 시퀀스를 반복되는 듯 싶지만 반복할 때마다 소리가 다른다. 처음 도입 시에는 터치가 강하게 들어가지만 드론소리가 깔릴 수록 반복되는 노트의 터치와 리듬이 달라진다. 어떨 때는 드론 소리에 편안하게 묻어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떨림과 떨림 사이에서 자신의 떨림 위치를 찾아가는 듯 들리기도 한다.

그렇게 4:33 동안 듣다보면 이노의 곡을 들을 때보다 더 내밀한 경험을 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둘은 ‘같은 곡’을 연주했지만 소리는 완전히 달랐다. 두 음악가의 사실 다른 의도를 가지고 다른 곡을 연주한 것이다.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남긴 말이다. 당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변하지 않는 세상의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해 탐구했었는데 헤라클레이토스는 딱 잘라 말한다. 변하지 않는 건 없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 같은 강이라고 생각했지만 강물은 계속 흐르고 변한다.

이 문장을 다르게 해석하면 우리가 같은 대상으로 인식하고 같은 언어로 불렀던 강이라는 것은 사실 영원히 변화해왔고 매 순간의 강물은 사실 다 다른 강물들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생존과 실용성의 이유로 ‘같지 않은 것을 같은 것’으로 언어화 해왔고 그 결과 차이를 인식하는 힘을 잃었다.

현실의 같은 곡, 같은 소리라고 불렀던 것들도 완전히 다른거다. 그 차이를 인식하지 못해도 인생에 하등 불편한 건 없지만, 그 차이를 인식하면 음악을 훨씬 더 다채롭고 풍부하게 즐길 수 있다.

믹싱과 마스터링의 과정이 들어간 소리와 실황의 소리는 완전히 다른거구나

이 말이 여전히 똑같이 읽히는가?

번외 - 조니 그린우드와 THX

입이 근질해서 덧붙이는 이야기

아까 조니 그린우드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곡을 말하며 THX Note를 연상했었는데 사실 이 둘 사이에 묘한 연관성이 있다. 조니 그린우드가 현대 클래식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을 좋아한다고 밝히고는 했는데 THX Note를 작곡한 Dr. Andy Moorer가 THX Note를 작곡할 때 올리비에 메시앙의 새의 카탈로그에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Dr. Andy Moorer가 밝히길 THX Note는 첼로의 Waveform을 따와서 신디사이즈 했다고 한다.

강렬하게 폭발하듯 매순간 변하는 스트링 사운드는 많은 음악가의 사랑을 받나보다.

현장에서는 기적이 일어난다

뜨거운 노가다 한 판 뛰고 왔다.

친구가 ‘자리만 지키고 뒷짐만 지고 있으면 돈 잘 챙겨준다’고 하길래 현장 노가다 일일체험 하러 갔는데,,, 30시간 잠을 못 자고 일했다. 드라마 소프라노스에 마피아들이 건설 노조 협박해서 유령 인원을 작업 명단에 때려넣고 돈 떼먹는 그런 일인 줄 알았는데,,,

이런 저런 재미있는 일이 많았지만 쓰기는 귀찮고 현장에서 일어난 기적에 대해서만 써본다.

나와 친구가 후반부에 맡은 태스크는 아래 사진 위쪽에 보이는 천을 천장에 다는 일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높은 사다리가 없다! 하지만 걱정마라! 시간은 이미 오후 8시, 10미터 거리에 공사장 인부들은 이미 다 퇴근했고 사다리가 현장에 방치되어 있다!

크루 한 명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다리를 가져온 덕에 쉽게 작업했다.

문제 발생!! 시간은 새벽 6시 거의 마무리 되어가던 천장 작업에 (블로그에 적지 못 할) 큰 문제가 생겼다. 작업을 싹 다 다시 해야하는데 사다리는 옆 공사장 인부들이 출근하기 전에 반납해야한다. 물론 작업 일정도 다 꼬였다.

일단,,,

우리는 6시 반에 자리를 파하며,,,, 10시에 현장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다.

크루원의 차를 타고 근처 모텔에 간다. 티맵이 얼빵하게 길 안내를 하는데 운전자가 그대로 따라가길래 야지 좀 주고 싶었지만,,, 욕망을 참았다. 한 20분은 손해 봤을거다.

모텔에 도착하니 7시. 9시 반에 나가기로 했는데,,, 난 밤잠에 들면 최소 4시간은 깨워도 일어나지 못하는지라 그냥 잠을 안 자고 침대에서 쉰다.

아래 사진의 모텔이 1박 12만원,,, 심지어 2시간 반만에 나가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퀄리티의 모텔에 감탄이 나왔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일단 침대에 눕자.

티비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틀고 9시반까지 쉬고 나오는데 몸이 개운하다. 왜지?

문제는 이 다음이다. 천장은 어떻게 하지? 사다리는 또 어디서 구하지? 사다리를 ‘빌린’ 옆 공사장에는 이미 인부들이 가득하다.

친구는 10초 고민하더니 말한다. ‘야 사다리 구하러 가자’

난 대답한다. ‘어디서? 아는 곳 있어?’

친구는 말한다. ‘몰라. 구하러 가자’

친구와 나는 골목을 나와 걷는다. 친구가 앞서 걸었고 난 뒤따라 걷기를 1분,,, 갑자기 친구가 외친다. ‘야 사다리 찾았다’. 놀랍게도 사다리는 옆옆 건물 뒤편 구석에 세워져 있었고 친구는 고민도 없이 사다리를 들고 나온다.

‘야,,, 이거 가져가도 되나?’. 가져가는 것 말고 답이 없는 걸 알지만 나는 바보처럼 묻는다.

친구는 아랑곳 않고 가져간다.

나는 외친다. ‘아 현장에서는 기적이 일어나는구나

옆 건물에서 ‘빌려온’ 사다리 덕에 현장은 잘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그 외

하나 덧붙이자면,,, 크루원들이 전부 프로 중에 프로였는데 목수 일을 하는 크루원이 저 가벽을 혼자 만드는 모습은 정말로 경외로웠다,,, 무협식으로 말하자면 동료 크루의 절정 경지의 무공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운기조식 해야겠다.

이 완벽한 각,,, 어떠한 빈틈이 없는 짜임새를 보라.

챗봇

뭐 외주 일 때문에 생전해보지 않은 AI 챗봇 개발을 위해 간단한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다.

테스트 겸 이때까지 쓴 블로그 글들을 Context로 넘겨서, 해당 Context를 바탕으로 AI가 응답하도록 함.

데모 01 - 핵심 키워드 3개

핵심 키워드를 꽤나 잘 찾아내고 후속 질문에 대한 응답도 매우 인상적이다.

데모 02 - 좋아하는 음악

요약/정리 능력은 좋으나 후속 질문인 ‘밤에 혼자 드라이브 할 때 적합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줘’에서는 그렇게 유의미한 플레이리스트가 나오진 않았다. 프롬프트를 조금 바꾸면 괜찮아질 것처럼 보임

데모 03 - 내 말투로 글 써줘

내 말투와 닮았으나 내용은 정말 거지같다. 끝에는 내가 내릴 만한 결론으로 마무리 짓지만 전혀 쓸모없는 글이다.

공개할거임?

안 함.

블로그에 챗봇이 있을 이유가 있나?

개인적으로도 활용할 용도가 있을까 생각해봐도,,, 없다.

뭐 사용할 용도로 개발한 건 아니니 재미로 보자.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영화가 섬뜩하다. PTA가 원래 이상한 영화만 찍어왔지만 이건 더 심하다. 너무나도 공격적이고 노골적이다. 그 미셸 우엘벡의 거친 사상과 태도가 영화 전반에서 느껴진다.

인간에 삶은 긴장과 이완의 연속이다. 선진국 기준으로 꽤나 장시간 이완의 기간이 있었던 것 같다. 평화, 평등, 안정, 자유 무역, 인권 같은 것들이 민주 운동, 인권 운동, 인종 갈등, 세계 2차 대전 등의 많은 긴장을 거쳐 시대에 뿌리내렸고 우리 세대에 와서는 안정이 당연한 일이 됐다. 이완된 시간이 흐리게 되면 앞서 말한 가치들의 의미가 변한다. 과거 세대가 싸우고 투쟁했던 적들은 여러 세대가 지나 기억 속에서 사라졌고 우리에게는 타자가 없는 가치들만 남아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믿어오던 가치들이 필요했던 이유는 망각하고 그 당위성만 교육 받을 뿐이다.

자신의 서식지를 잃고 외딴 곳에 던져진 가치들은 그 의미를 잃게 된다. 처음의 의미를 잃은 가치를 기반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에는 균열이 생기고 그 균열을 향해 누군가 질문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저 가치를 지킬 필요가 있었던거야? 저건 악이야!’.

그렇다 긴 이완의 끝에는 긴장이 온다.

아래는 친구가 싸온 샌드위치. 영화 보면서 먹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