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거의 두달 전에 개봉한 헤어질 결심을 드디어 봤다. 주변에도 하도 보라고 했는데 귀찮아서 안 보다가 이제서야 보는거다.

플레이타임이 약 2시간 반이나 되는 영화이다보니 전개 상 큰 줄기의 갈등과 해소의 과정이 좀 길고 이를 기다리는 것이 약간 지겨운 부분도 있었으나 영화 매 장면에 작품 속 인물들의 사소한 행동이나 말에서 드러나는 감정 교류들, 결말을 숨기지는 않지만 즐거운 방식으로 보여주는 복선들, 약간 과장되게 디테일한 설정과 미술들, 반복되는 테마는 몰입도를 떨어트리지 않았다

영화는 바다, 품위, 붕괴, 꼿꼿함을 대사와 행동, 장소, 영화 속 미술 등 많은 부분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낸다. 남주인공 박해일은 첫 장면의 살인 현장에서 사건을 철저하게 수사하기 위해 눈에 안약을 넣어가며 사망자의 부패하여 벌레가 드글거리고 냄새나는 시체를 유심히 살피고, 사망자가 추락한 절벽을 직접 암벽 등반하여 오른다. 경찰서에 복귀해서는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 사건에 집착하며 꼭 해결하고자 하고 상부에서 실적 압박이 와도 자신이 해결해야만 하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사명을 다한다. 그 과정에서 칼을 든 범죄자를 제압하기도 하고, 밤에 잠도 못 자고 잠복 수사를 하고, 집에는 끔찍한 사건 현장이 가득한 사진 붙여놓고 쉬지 않고 사건 해결에 최선을 다한다. 자신의 일에 사명을 다해왔고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 주변으로부터 존경을 얻을 수 있었고 그것이 그의 품위다. 

그의 품위는 수사 과정에서 만난 탕웨이에 의해 붕괴된다. 예쁘고 젊은 외국인 탕웨이는 중국에 병으로 고통 받는 어머니를 펜타닐로 살인하고 형벌을 피하기 위해 한국에 밀입국한 중국인으로 남편이 절벽에서 떨어져 사망한 미망인이다. 처음에는 참고인으로 수사 받지만 알고보니 그녀는 가정의 불화와 남편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남편을 살해한 살인범이었다. 그녀는 잃을게 없다. 자신의 조부모가 한국의 한 야산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그 땅은 조선-일제강점기-대한민국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소유권을 잃었고 고국인 중국도 잃었으며 안정적인 인생의 길도 잃은 사람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품위를 신경 쓸 여유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 그녀는 살인을 행해서라도 자신을 삶과 욕망에 솔직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이고 그런 그녀가 박해일에게 빠졌을 때 그녀는 과감했다. 탕웨이는 취조 받는 과정에서 어떤 때는 은밀하게, 어떤 때는 노골적으로 박해일에게 관심을 표현하며 그 모든 과정에서 품위나 여타의 것이 아니라 솔직한 자신의 감정에 집중한다.

취조 과정에서 박해일은 탕웨이에게 산을 좋아하냐고 묻고 탕웨이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은 바다를 좋아한다고 한다. 그녀는 격정적인 파도가 이는 바다와 같은 감정을 가졌으며, 위험한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에 내던져진 사람이다. 그녀에게 설 땅(산)은 존재하지 않는다. 박해일도 바다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는 가정과 직장, 품위라는 육지(산)에 서있지만 자신의 마음 속에서 일렁이는 격정적인 바다를 못 본 척 하지는 않는다.

박해일은 수사과정에서 탕웨이에게 빠지게 되고, 또 그녀가 살인범이라는 것도 알게된다. 그는 자신의 직업적 자부심을 저버리고 그녀의 범죄를 못 본 척하고 수사 종결을 내렸고 그렇게 그는 붕괴된다.

박해일은 이후 그녀를 만나지 않고 자신의 가정과 일에 집중하려고 했으나 이미 그는 가정, 일 모두를 저버렸고 그 마음의 상흔은 그에게 우울증과 불면증을 준다. 

이후의 이야기는 짧게 정리하면 박해일은 타지로 전근을 갔으나 탕웨이가 그 지역에 새로운 남편과 찾아오고 또 그 남편은 살해당한다. 새남편이 탕웨이와 박해일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게 된 후 탕웨이에게 이 관계를 폭로하겠다는 협박을 했고, 탕웨이는 자신의 사랑과 박해일을 지키기 위해 새남편의 살해를 유도하고(이 과정에서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르고) 이내 박해일에게 사랑을 전하고는 바다에 간다. 썰물 때 해변 모래를 파고 만든 구덩이에 들어가고서는 밀물을 기다린다. 사나운 파도소리와 숨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바다에 영원히 몸을 맡긴다. 박해일은 탕웨이 폰에 설치한 위치추적기 덕분에 그녀가 바다에 몸을 맡긴 바로 그 위치까지 찾아갈 수 있었으나 그녀는 이미 흘러버린 파도. 그녀를 애타게 찾지만 파도는 이미 지나간 이후다.

박해일이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위를 헤집으면서 영화는 끝난다.

한 달 정도 전 쯤에 무인도에 간 적이 있다. (말이 무인도이지 배가 정기적으로 다니고 안에 작은 발전 시설도 있고 민박도 있고 조그마한 구멍가게도 있다. 뭐 접근이 어렵지 않지만 사람이 많지 않은 섬 정도로 불러야하는게 맞을 것 같다.) 간 날 오후부터 비가 많이 오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텐트를 치고 잤는데 백패킹의 경험이 전혀 없는지라 이 비바람에 텐트가 무사할 지 의문이었고 밖은 어떠한 빛도 없이 깜깜해서 무시무시한 자연 속에 내던져진 기분이 들었다. 그때 계속해서 내가 서있는 영토에 대한 의심이 들었다. 당연히 별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내가 서있는 이 땅이 망망대해 위에 망망하게 떠있는 섬이라는 생각이 드니 발과 땅 사이의 접점인 발바닥에서 느껴야할 강한 안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가족, 친구, 일, 사회, 국가, 인종, 종교, 돈, 시스템 등 다양한 형태의 안정된 영토 위에 발을 얹고 살고 있다. 혹자는 이 다차원의 땅들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유랑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그 땅 위를 딛고 살면서 오는 안정감을 원한다. 그리고 그 땅 위에 정주하기 위해 행해야할 일들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만족감을 느낀다. 하지만 인간은 시스템에 온전히 속박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땅 위에 서있으면서도 바다를 바라보고 바다 너머를 상상한다. 바다로 넘어가면 자신의 땅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쉽게 발을 내딛지는 않지만 그 일렁이는 마음 조차 부정할 수 없다. 박해일은 그 일렁이는 마음을 직면했고, 그 덕에 발을 내딛고 자신의 영토가 붕괴시켜버렸다. 

단지 박해일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 마음에 속에 있는 일렁이는 마음이 있고 보통 그 마음을 부정하거나 소극적인 방식으로 그 마음의 흐름에 몸을 맡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 마음이 해소되지 않는다. 이 땅에서 추방될 수 있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그 마음 가는 방향을 따라가다보면(박해일은 잠복수사의 핑계로 탕웨이 훔쳐보며 마음을 키운다) 결국 그 마음이 집채만한, 아니 거대한 달 덩어리 크기의 파도가 되어 자신을 덮치고 바다로 쓸려가버린다. 인간 사에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렇게 흘러갔다. 그것이 소문자 역사일 수도 있고, 모더니즘과 이데아에 가려진 세상일 수도 있다. 아니 그것이 온 세상을 샅샅이 비추는 해가 저물고 밤에 떠오른 달빛 아래 희미하게 빛나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최근에 친구가 삶이라는 것은 그저 고통이며 즐거움릉 찰나의 순간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그 생각에 크게 공감하게 됐다. 우리는 자신이 서있는 땅 그 너머를 바라보기에 고통 받고 이 땅을 떠났고자 하거나 떠났기에 벌을 받는다. 아까 말한 인간의 생이 깃든 이야기는 고통으로 가득찼지만 찰나의 기쁨이 담긴 이야기들이다. 그 이야기들은 파도에 쓸려 바다를 영원히 유랑한다. ‘모든 것은 저 물처럼 흘러가리니! 낮에도 밤에도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물처럼.’이라는 중국의 속담처럼 바다에 잠겨 흘러가버린 더이상 들을 수 없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해진다. 박해일은 탕웨이가 죽은 이후 남은 생 내내 바다에 휩쓸리며 고통을 받을 것이고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 물 속에 흘러가고 사라져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