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순환하고 일생은 압축된다 (혹은 중경삼림에 관한 이야기)

저번 주 지방 선거 날에 친구와 같이 호수 삼계탕 집을 가게 되었다. 그곳 위치가 조금 애매하여 친구와 버스를 타고 가던 중 신도림과 영등포 사이 문래동에 내려서 남은 길은 걸어가기로 했다. 내린 지점에서 쭈욱 남쪽으로 걸어가면 되는데 내려가는 도중에 경부선, 1호선 철도를 넘기 위해 크지 않은 다리를 건너야했다. 다리가 조금 높게 떠있다보니 다리 위에서 철도 및 주변의 고가도로들이 훤히 보였다. 시야가 탁 트인 그 곳에 잠시 서 주변을 바라다보는데 내 밑을 지나가는 기차며 저 멀리 고가도로 위를 지나가는 차가 이름 그대로 기차나 차로 보이는게 아니라 어떤 반복되는 파동 같이 느껴졌다. 저 멀리 차들은 차간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하며 지나간다. 마치 개미 같기도 하고, 의료 드라마에서 자주 보이는 심장 파동 그래프 같기도 하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

잠시 생각해보니 우리 삶의 대부분의 일들이 반복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열차는 일정한 배차간격으로 지나가고, 열차 옆면의 창문이 마치 패턴과 같이 균일하게 그려져있다. 전봇대가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으며 도로 위의 중앙 분리대가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다. 빌딩과 아파트의 창문과 외장재가 반복되는 패턴을 그려낸다. 사람들이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또 버스를 타고 버스를 내린다. 그리고 다시 거리로 돌아간다. 커피집에 사람이 들어가고 주문을 하고 커피를 들고 다시 거리를 나선다. 그리고 다시 사람이 들어가고 사람이 나온다. 도로 위의 지방선거 벽보는 4년 마다 눈 앞에 나타난다. 24시간 마다(정확히는 아니지만) 해가 뜨고 해가 진다. 365일 마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또 겨울이 온다. 매일 출근하고 또 퇴근한다. 돈까스를 먹고 닭갈비를 먹고 제육을 먹고 또 돈까스를 먹는다. 그리고 7일에 한번씩 주말이 시작되고 주말이 끝난다. 그렇게 주말이 반복되다보면 부처님 오신 날도 오고 생일도 오고 빼빼로데이도 오고 연말도 오고 새해도 온다. 그리고 다시 주말이 반복되다가 부처님 오신 날도 오고 생일도 오고 빼빼로데이도 오고 연말도 오고 새해도 온다. 2년 마다 올림픽인지 월드컵이니 하는게 온다. 

이렇게 반복되다 보면 기억이 뒤죽반죽이 된다. 몇 초 단위로, 몇 분 단위로, 몇 시간 단위로, 몇 주 단위로, 몇 년 단위로, 반복되는 사건, 그리고 반복되는 도심과 부도심, 상가 지역과 업무지구, 주거지와 상가, 커피집과 음식점, 편의점 속에서는 내가 겪는 일들은 구체성을 잃어버린다. 어제 돈까스를 먹었는지, 저번 주에 친구랑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오늘 물을 몇잔 마셨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 뿐이 아니다. 내가 쓰던 비누가 무엇이며, 칫솔이 무엇이고, 내가 본 영화는 무엇인지, 내가 먹는 통조림은 무엇인가? 무엇이긴 한데 구체적 차이는 나에게 인식되지 않는다. 내가 오래 전부터 좋아하는 노래는 무엇이였으며 이 노래를 왜 좋아하는가?  California dreaming을 예전에 사귀던 여친과 자주 들었기에 좋아했던가? 그 여자랑 얼마나 사겼지? 4개월인가 5개월인가 3개월인가? 나이가 몇 살이었는가? 몇 번 버스를 탔지? 어쩌다 만났지? 그러고는?  나를 스쳐지나가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무언가 계속해서 발생하지만 그 모든 일들은 단지 일상으로 치환되어 버릴 뿐이다. 그 치환 과정에서 수치는 어떤 느낌으로 치환되어 버리며 타인의 기억을 나의 기억으로 바꾸어버린다. 그리고 그 순간들을 기억해내려고 하면 단지 내가 그 사건에 부여하고 싶은 중요도에 따라 적당한 정도로 수치를 제시하고 사건을 묘사한다. 사실 기억해낼게 없지 않은가? 몇개의 점심 메뉴와 데이트 코스를 조합해내면 내 삶이 나오지 않던가?

(물론 위에 전 여친이야기는 진짜 내 경험은 아니고 중경삼림의 양조위 이야기다. California dreaming은 중경삼림을 보고 난 이후 좋아하게 되었다. 아마…)

반복되는 것은 압축될 수 있다. 우리는 무한히 위아래로 출렁이는 사인 그래프를 그릴 필요 없이 ‘2파이 마다 1과 -1 사이를 진동한다’는 말로 사인 함수를 표현해낼 수 있다. 이를 비추어보면 우리의 일생 또한 일상의 무한한 반복이며 어쩌면 우리의 일생 또한 짦은 한 문장으로 설명될 지 모른다. 우리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다. 매 월드컵 때마다 ‘졌지만 잘 싸웠다’, ‘16강 진출 경우의 수는’ 과 같은 기사를 더 이상 보지 않더라도 이미 유머 게시판에서는 자기들끼리 예측하고 깔깔 비웃는다. 

정보 이론에 엔트로피라는 개념이 있다. 정보 이론에서의 엔트로피는 정보의 무질서성, 혹은 불확정성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엔트로피가 높다는 건 정보가 무질서하다는 뜻인데 이는 다시 말해 압축이 힘들다는 것이다. 단순히 생각해보면 우리의 일상이 불규칙하고 매일 다르다면 짧은 한 문장에 설명할 수 있겠는가? 엔트로피의 개념에 비추어보면 대부분 인간의 삶은 0에 가까운 엔트로피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무한히 생산하고 소비하고 욕망하며 쓰레기를 배설한다.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정지해있다. 

우리는 살아있는 것일까 죽어있는 것일까? 아마 반반인 것 같다. 장정일의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에 나오는 “일상을 반복시키는 것은 단순한 반복이 문제가 아니라, 특별한 사건 마저도 일상에 편입시키는 인간의 무기력함이다”과 같은 구절처럼 죽은 우리가 살아있는 세계를 죽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이 사회가 살아있는 인간을 죽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야지 엔트로피가 떨어져 관리가 편하지 않겠는가? 어느 쪽이든 우리는 무한히 생산하고 소비하고 욕망하고 또 쓰레기를 배출한다.

먼저 드는 단순한 생각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 끝없이 도전하고 안주하지 않으며 변화하는 삶. 주변을 항상 새롭게 바라보고 관찰하고 또 느껴라. 좋은 말이긴 한데 이 말도 자주 듣다보면 YOLO가 머리 속에 떠오른다. 끝없이 즐겁게 소비하라!

내가 더 마음이 가는 것은  순환 중 만나는 점이다. 계속 비슷한 궤적으로 반복해서 원을 그리다보면 어떤 둥그런 원이 생긴다. 원을 못 그리는 사람도 원을 빙글빙글 연필로 계속 덧칠해가다보면 원이 둥글어가지며 옆사람의 원과 닮아간다. 하지만 그렇게 그리다가 재채기를 한번 해버리면 궤적이 튀어버리고 그 튀어버린 궤적은 얼마간 원을 그려서는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의 삶에는 이 같은 기억들이 종종 있다. 의도하지 않더라도 닿는 순간들. 인생이 정지한 것 같지만, 이 같이 튀어버린 기억들은 시간을 운동시킨다. 그때 바에서 만난 여자와 지낸 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의 조깅, 그 여자로부터 온 생일 축하한다는 음성 메세지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순간이 정지한 시간을 움직인다. 그리고 이 순간은 만년을 만든다는 것을 깨닫는다. (당연 마지막 이야기도 중경삼림 이야기다.)

드디어 아주 오래 전부터 시도했지만 실패한 중경삼림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