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유튜브에서 어떤 할리우드 여배우의 무슨 애미인지 아카데미인지 하는 상을 받고 떠들어 대는 수상 소감을 봤다.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었다. 상 받아 기쁘다. 할리우드는 어떠한 특수 집단이 아니다. 지금 당장 여기에 모인 배우들만 봐도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국적 또한 다양하다. 할리우드는 곧 다양성이다. 그리고 우리 할리우드의 배우들은 연기로 사람들에게 감정을 전하는 일이다(뭐 다르게 말했던 것 같은데 별 관심은 없다). 하지만 지금 세태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대통령은 장애인 기자 흉내나내며 약자를 무시하고 있으며 기자는 진실을 전할 의무를 다하지 않으며 파파라치질이나 하고 있다. 우리 배우들은 이런 세상 속에서 겪는 고통과 아픔을 연기로 승화시키는 것이 어떨까? 정도의 내용이었다.
이 수상 소감을 보면서 정말로 기만적이다라는 말 밖에 안 나온다. 나에게 배우의 예술적 연기를 받아들일 감각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연기를 할 수 있는 토대를 안다. 바로 우리 대중의 돈이다. 그들은 우리의 돈을 받고 연기를 하며, 우리의 돈을 받지 못하면 연기를 할 수 없다. 그럼 대중은 돈을 누구에게 줄까? 여기서 대중은 나도 아니고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도 아니다. 내가 느끼기에 대중은 각 개인의 개별성이 사라진 거대한 돈의 흐름이다. 이 거대한 돈의 흐름은 그렇게 예술성에 관심이 많은 것 같지는 않다. 몸매가 끝장나는 섹시한 미남 미녀 배우, 대규모의 폭발, 살인, 마약, 범죄, 사랑, 섹스 같은 것에 관심이 많다. 물론 이런 요소에 소위 ‘예술’을 끼워팔면 대중은 더 좋아한다. 대중은 이런 것들은 원한다. 그리고 기자는 그저 이 대중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다. 대중이 배우들의 연애사, 섹스 관계, 스캔들, 누드 등등의 짓거리들을 보고 싶어하니까 파파라치질을 하는 것이다. 파파라치라고 지들 인생사에 그렇게 관심 있는 줄 아는가? 그냥 대중이 원하니까 하는거다. 파파라치는 이 수상 수감을 말한 여배우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날릴 자격이 있다. 그러는 너는 얼마나 고상한 세상에 살고 있는데? 니가 서 있는 그 세계는 사실 나 같은 파파라치를 만든 세계 아니냐고? 니가 찍은 그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니들 이름이 나오는 스캔들 기사를 보자마자 조건 반사로 누르는 사람들이라고. 너는 그 사람들의 돈으로 영화를 하고 있는거라고. 그리고 나도 그 돈을 위해서 니들 따라다니는거고. 이 같은 질문으로부터 여배우는 자유로울까?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대중에게서 취할 것은 다 취하고,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며 인격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저 말을 한다고 기자들이 변할 것인가? 절대 아니다. 이 여배우도 아마 그 사실을 알 것이다. 하지만 이 배우는 제정신 박힌 군자 노릇이나 하며 자기 만족을 하고 있다. 혹은 더 나아가서 동료 배우들과는 다른 이미지를 구축하며 자신을 조금 차별화하는 일에 불과하다. 정말로 기만적인 수상 소감이다. 진짜 다시 한번 말하지만 돈 받아쳐먹으면서 이용할 것 다 이용하고 기껏 하는 말이 나는 연기로 인정 받고 싶어요 같은 이율배반은 정말로 싫다. 어쩌면 이게 이 세상의 정신병스러운 모습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이 글은 이 여배우를 까겠다고 쓴 건 아니다. 이 따위 볼멘소리야 나혼자 짓거리면 그만일 일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포인트는 두 집단 ‘배우’와 ‘기자’ 모두 자기 할 말이 있는 것이다. 배우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연기를 하고 싶으나 세상이 허락하지 않기에 세상에 맞는 방식으로 나의 예술혼을 펼친 것이다. 기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도 진실을 전하고 싶지만 사람들이 보지를 않고 돈도 되지 않아 굻어죽을 지경이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생업을 지속하는 것이다. 사실 더 있다. 영화 제작자는 돈으로 모든 자신의 행위를 변명한다. 글을 쓰는 나는 자신의 무기력함으로 나 자신을 변명한다. 대중은 피곤함과 무기력을 가지고 침묵한다. 대중은 침묵하며 돈을 쓸 뿐이다.(대중은 시끄럽지만 사실 정말로 침묵하고 있다) 결국 각자의 변명이 있고 각자의 죄악이 있다. 우리 모두 이 사회 속에서 돈을 벌거나 쓰는 과정에서 이 같은 죄악의 굴레에 빠지게 되어있으며 각자의 변명이 각자의 입장, 계급, 집단에 따라 이미 정해져있다. 우리가 수행할 일은 미리 짜여진 변명을 가지고 자신이 하는 행위를 옹호하며 자신 이외의 세상의 죄악을 혐오하면 된다. 그렇게 자신은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는 이성인이 될 수 있게 된다. 이 세계 속에서 우리 모두는 이성인이다. 모든 이성인은 자신을 높은 자리에 올리고 그 밑의 다수를 혐오하며 세상을 나아가는 것이다. 각자 모두가 이러고 있다. 이를 다시 생각해보면 이런 것이다. x, y planes 위에 두 점 (10, 0), (0, 10)이 있다. 각자는 각자의 plane에서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하며 산다. 하지만 사실 두 점은 (10, 0, 0), (0, 10, 0) 위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둘 다 똑같은 z plane 위에 있으면서 자신이 더 낫다고 싸우고 앉은 것이다. 이때 차원을 모든 사람 수 + 1 만큼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수평적 혐오 구조에 빠져있고, 이 혐오 구조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의 가치와 정당성을 찾으며 삶을 성실히 수행해나가는 것이다. 정말로 이 시스템은 보면 볼 수록 놀랍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첫번째 아이디어는 돈의 교환의 악이다. 이거 쓰면 아마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옛날이었으면 잡혀갔겠지만 지금은 운동권 정부니까 아마 대통령 상을 받지 않을까?(100% 농담이다). 우리는 모든 것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한다. 자신의 시간, 노동, 예술, 학문, 섹스 등등 모든 것은 돈으로 환산된다. 하나의 기준 돈으로 환산 가능하다는 것은 모든 것들은 교환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 환산 과정에서 환산 대상의 개별성을 사라지고 오로지 환산 가치만이 남게 된다. 이때 교환 과정에서 고려되는 요소는 가격 뿐이다. 배우의 연기의 가치는 관객의 수, 다시 말해 돈에 의해 결정된다. 기자의 기사의 질은 솔직히 말해서 돈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그 돈은 어디에선가 대중이라는 인출기 혹은 블랙 박스에서 뽑혀나온다. 이때 이 자판기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돈이 나오면 가치 있는 일이다. 여기서 각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돈은 그냥 모른 척 받으면 된다. 하지만 타인의 돈에 대해서는 각자의 상상을 섞으며 비난하면 되는 것이다. 그 돈을 주는 자판기의 내부 구조를 멋대로 상상하고 도덕적으로 비난해도 좋고, 상대방이 돈으로 환산하는 행위 자체를 비난해도 좋다. 모두 똑같은 굴레에 있지만 비난의 상상력은 타인의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두번째 아이디어는 대중 사회에서 개인의 특성을 사라지고 어떤 패턴 속의 집단으로 규정된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저 수상 소감을 말한 배우를 잘 모른다. 저 배우가 나온 영화도 2편 정도인가 밖에 안 봤으며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모른다. 그저 나에게 있어서 저 배우는 할리우드의 한 배우에 불과하다. 자신의 매력의 대중에게 팔아 돈을 버는 그 집단 말이다. 배우는 무한정 많으며 나는 그 배우들을 다 일일히 구분할 사고의 유연성을 가질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그 배우들에 대해 알 방법이 없다. 이는 배우에 대해서 만이 아니다. 정치인, 기업가, 예술인, 직장인, 기술자 등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집단에 대해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이 모든 존재들은 어떤 의미로 나에게 실존하는 존재들이고 나는 이 모르는 존재들하고 상호작용을 해나가고 있다. 결국 이 상호작용에서 남는 것은 엇갈리는 충돌 뿐이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집단은 침묵한다.
‘똑같은 벽돌들 사이에 서로 다른 미소가 있네’, ‘가는 곳은 모두 다르지만, 지금 같은 곳에서 만났네’. 서로 다른 우리는 같은 곳에서 만나 무엇을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