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과 노트북 모두 맛탱이가 갔다. 폰은 맛간지 한달이 다 되어가고 노트북은 1주일 전 쯤 맛이 갔다. 덕분에 평생 할 생각이 없었던 디지털 디톡스를 하게 되었다. 노트북은 나의 밥줄이며 나의 가치를 증명해주는 녀석이기에 항상 나와 함께하고 다녔다. 어디 술 먹으러 가든, 여행을 가든, 어디를 가든 노트북은 함께였고 최근에 내 친구들 중에서 나랑 노트북이 떨어져있는 순간을 목격한 사람은 잘 없을 것이다. 그 나의 동반자가 사망해버리셨다… 물론 정확하게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 전체 구동은 이상 없으나 디스플레이가 나오지 않는다… 아마 디스플레이 커넥터의 접촉 불량인 것 같은데 miniDP, hdmi 외부 출력을 사용하면 정상 사용은 가능하다. 물론 데스크탑처럼 정상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화면이 안 나오는 노트북이니 이전처럼 들고 다닐 수가 없고 나의 연구실 자리에 내가 오나가나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신다. 고고하시기도 하지…. 데스크탑도 따로 있기는 하지만 내 주요 작업환경은 노트북이다보니 타격은 즉시 왔다. 가장 큰 문제는 기숙사 방에서 공부를 하지 못한다. 기숙사 방에는 따로 컴퓨터를 놔두지 않아서 언제나 노트북으로 코드를 보거나 논문을 읽고 그랬었는데 그게 불가능해진 것이다. 또한 어디 움직일 때도 나의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의 가호를 업고 노트북으로 작업을 할 때가 많았는데 이 또한 불가능해졌다. 완전히 잘못되어 버린 것이다.
당장 노트북을 수리하여 상황을 해결하고 싶지만 이 또한 녹록치 않다. 일단 수리비가 80이 든다… 말이 안 된다. 아무리봐도 커넥터만 다시 결착시키면 되는 일인데 그걸 80 주고 고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수리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이 또한 불가능에 가깝다. 내 사과는 끊임없이 중력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셨는지라 유니바디 외장이 완전히 엉망이다.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지셔서 뜯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뜯으면 확실히 다시 못 닫는다. (조립은 분해의 역순이 아니다) 그럼 새 노트북을 산다? 일단 맥 아니면 쓸 생각이 없기에 새 15인치 맥북을 사려고 하니 그 가격이 279만원이다. 그렇다면 반년 전 쯤 고민했던 12인치 아이패드 프로를 살까 서피스를 살까 생각하니 그것도 영…. 아이패드 프로는 그 스마트 키보드인가 뭐시기인가가 각도만 조절되도 바로 샀는데 그게 안 되니 마음이 덜 간다. 결국 이도 저도 못하고 있다.
그렇게 강제로 상황을 받아들이고 지내니 나와 노트북의 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일단 방에 들어가면 유튜브를 켜서 음악을 틀어야했다. 음악은 또 지금 기분에 맞는 음악을 틀어야하니 계속 난잡하게 번쩍이는 유튜브 인터페이스를 뒤적여야한다. 그렇게 음악을 틀었으면 루리웹을 들어가 최신 게임 동향을 확인하는 동시에 볼만한 애니 없는가 확인해본다. 그러다 어쩌다보면 나무위키에 들어가게 되고, 또 어쩌다보면 별의별 이상한 사이트를 들어가면서 여기저기 난잡하게 들쑤시고 다닌다. 그런 일들을 하지 못하게 된 나는 생각한다.’ 아… 노트북이 없어서 코드도 못 보고 일도 못하네…’. 그렇게 아무것도 못하고 카톡도 안 깔린 폰이나 만지면서 뒤척이다 잠을 잔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다 보니 삶이 바뀌었다. 생활의 발견이라는 표현이 계속 생각나는 변화이다. 일단 당장 뭐 돈이 없으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내 상황을 바라보니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왔다. 컴퓨터는 오직 연구실에서만 쓸 수 있다. 카카오톡도 거의 마찬가지이다. 연구실 밖에서는 컴퓨터를 하지 못한다. 코드를 보려면 연구실에서 해라. 정보를 찾고 훑으려면 연구실에서 해라. 약속을 잡으면 정확히하고 정확히 나가라. 방에서는 논문을 읽거나 책을 읽어라. 음악은 난잡한 유튜브에 현혹되지 말고 폰에 있는대로 틀어라. 딱히 의지를 가지고 정한 규칙도 아니고 애써 생각해낸 것 또한 아니다. 그냥 자연스레 떠오른 법칙이다. 그리고 이대로 삶을 흘려보내니 큰 의지 없이도 삶이 부드럽게 흘러간다. 더이상 연구실에서 밍기적거리면서 일을 미루고 딴 짓하다가 집에서 일하겠거니 생각하지 않는다. 더이상 방에 누워 내가 할 일을 곧 하겠지 생각하며 웹서핑을 하지 않는다. 방에서는 그냥 옆에 놓인 책을 읽다가 자면 그만이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멍하니 웹을 보지 않는다. 잠을 더 자거나 잠시 멍 때리고 씻고 연구실에 나간다.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정해지니 할 수 있을 때 일을 하고 할 수 없을 때 일을 신경쓰지 않고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글 쓰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컴퓨터로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고 빠르게 아이패드를 사려고 했으나, 그냥 받아들이고 종이에 글을 쓴다. 더이상 지금 기분에 맞는 음악을 찾겠다고 interrupt를 걸고 유튜브를 probe하지 않는다. 그냥 쉼없이 차분히 글을 써간다.
사실 디톡스와 같이 옵션을 제거하는 일은 자신의 마음 길을 바꾸는 가장 단순하고 유치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되게 예전에 썼던 방법이었고 요즘 잘 쓰지도 않고 쓸 필요도 없었던 것 같다. 요즘에는 사는 방법에 그렇게 제약을 두지도 않는 것 같고, 시간을 내가 원하는 대로 쓴다고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뭐 어쨌건 디지털 디톡스는 효과는 대단했고, 명시적이고 단순한 외적 변화가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맥북은 언제 고치지…
(이 글은 블로그 올리기 4일 전에 종이에다가 쓴 건데 이 글을 올리는 시점에 맥북이 지 혼자 자가 수리했는지 잘 된다…에셔의 그림이 생각난다… 물론 밑의 사진은 에셔꺼는 아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