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하프마라톤

저번 주말에 내 고향 구미에서 열린 하프마라톤을 완주했다. 내 첫 달리기 대회 완주이자 하프마라톤 완주이다.

대회 신청

2월 초 설 지나고 난 이후에 급하게 신청한 대회다. 대회는 하프, 10km, 5km 코스로 구성되어있는데 여기서 하프를 고를 지 5km를 고를 지 고민된다. 신청 시점에는 10km 이상을 달린 적이 없어서 쫄보처럼 10km나 달릴까 싶다가 코스 지도를 보고 하프를 선택한다. 아래 하프 코스도를 보면 낙동강을 따라 달리는데 10km 코스의 경우 왼쪽에 넓게 펼쳐진 공단 지역만 달린다,,, 공장 보면서 달리면 우울하지 않겠는가.

신청했지만 겁난다. 10여년 전에 달리기를 시작했으나 20년도에 류마티스가 온 후 거의 3년 반을 못 뛰다가 최근에서야 겨우 뛰는거다보니 다른 모든 것보다 다치는게 제일 무섭다. 심지어 23년도에 다 나은 줄 알고 달려보다가 다시 병 재발한 경험이 있다보니 깡으로 버틸 생각 따위로 임할 수는 없다.

2월 내내 달렸다. 기록을 보니 총 14회, 130km 정도 뛰었다고 나온다. 뭐 그리 많은 수치는 아니지만 마지막 주에 약간의 부상으로 푹 쉰 걸 생각해보면 하루 뛰고 하루 쉬고를 꾸준히 실천해온 셈이다. 좀 급작스럽게 10km… 15km… 21km로 거리를 올리다보니 썩 순탄한 달리기는 아니었다.

산달리기

2월 첫 훈련은 산달리기다. 2월 초에 동네 광교산을 뛰어올랐었는데, 이게 내가 했던 훈련 중 가장 멍청한 훈련이었다. 1월 말 설 때 폭설이 내렸다보니 산에 눈이 가득했고, 눈이 온 지 조금 됐다보니 길어 왕창 얼어있었다. 그 길을 밤에 등산화도 아닌 운동화를 신고 등산 스틱 없이 해가 진 이후에 달렸으니,,, 오르기 시작한 지 5분 지났을 때 이거 더 오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강행한 결과,,, 진심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어쩌겠는가 억지로 오르고 내려올 수 밖에.

산달리기 자체는 재미있다. 계단에 쌓인 눈은 생명의 위협을 주지만 완만한 능선의 눈(빙판,,,?)을 밟으며 달릴 때는 상쾌하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 집 뒷산을 매일 뛰어올랐는던 기억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아침 9시 수업을 가겠다고 학교 쪽문에서 시작해서 고지대에 있는 건물 9층에 뛰어오르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산달리기가 멀게 느껴졌는데 한때 이게 일상이었다.

이제 산달리기를 종종 해보련다. 동네에 오를 산들도 몇개 있어보이고 예전에 한바퀴 걸어서 돌았던 한양 도성을 뛰어서도 돌아봐야겠다. 그리고 산달리기 대회들도 참여해보련다

참고로 트레일런 홈페이지들의 소개 페이지들의 디자인은 매우,,, 멋지다! 아래는 올해 6월 7일에 열리는 제 8회 청-광 종주 의왕대간 Trail Running 사이트의 소개 문구들이다.

도대체 라면은 뭘까,,,

올해 4월 12일에 열리는 [서울트레일런](https://surally2406.webmaker21.kr/competition/outline?ca_id=01&wm_id=19] 페이지의 디자인은 평범하지만 문구가 마음에 든다.

참가자격 : 자신의 체력을 증진시키고져 늘 자연과 수련하는 도반 이라면 누구나,

모든 선수분들께서는 운동후 샤워하시고  시청역7번출구 한화금융프라자 지하1층 오리마당 대한민국 최초  이슬물과 1000.도에 녹인 카스트솔트로 만든 음식을 준비하여 선수분들께 오리탕 1그릇씩 드시고 갈수 있도록 준비하였습니다.

왜 읍니다가 아닐까,,,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 참여해보면 재미있을 듯하다.

트레일러닝? 산달리기!

다들 트레일 러닝이라고 부르는 것을 난 굳이 산달리기라고 부른다. 꼬여있는 심사 때문이다. 당장 구글이나 유튜브에 트레일러닝을 검색해보라. 상위 페이지에 온갖 장비 추천, 브랜드 추천 같은 것들이 뜬다. 정신 안 차리고 들여보다가는 산달리기 장비가 잔뜩 쌓일 것이 분명하다. 소비의 악마들이 뇌를 가지고 놀 때 자주 쓰는 전략이 한글 용어를 영어 용어로 대체하고 그 용어 주변에다가 상품을 마구잡이로 엮어버리는 것이다. 간악한 악마의 꾀임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산달리기라고 부르자!

이번에 뛰어보니까 신발은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다른 장비는 잘 모르겠다. 다행히 스틱은 있고 달리기 벨트도 있다보니 짧은 뒷산 달리기는 문제없다. 물 등의 필수품을 수납할 수 있는 조끼는 필수품처럼 보이는데 나중에 길게 달릴 때 사던지 해야겠다.

착한 소비

소비를 혐오한다고 위에 써놓고 소비의 위대함을 이야기하려한다. 2월 훈련 중 가장 극적인 변화를 준 건 새로 산 운동화다. 아까 말한 소비에 대해 꼬인 심사 때문에 운동화도 코스트코에서 파는 5만원 짜리 신발을 신고 달렸었는데 (코스트코에서 샀으면 이미,,,) 하프 준비 과정에서 오는 부상들 때문에 몸 상태에 대한 경각심이 생겨 나이키에 괜찮은 운동화를 하나 샀다. 별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효과는 굉장했다. 매번 뛸 때마다 류마티스가 왔던 왼쪽 무릎과 오른쪽 발목이 시큰했는데 새 신발을 신으니 통증이 전혀 없다. 상품 상세 페이지에서 설명하는 ‘차원이 다른 반응성과 쿠셔닝’, ‘초경량 줌X 폼이 일상의 러닝에 높은 에너지 반환력을 제공하기 때문에 활력 있게 달릴 수 있습니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다. 난 보통 저런 말들은 거짓된 마케팅 용어라고 무시해왔다. 눈 가리고 귀 닫고 나이키가 신제품 운동화를 만드는 건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믿으면서 그들이 신발을 만드는 본질적 목표를 망각했다. 그들의 주요 목표는 고객들이 건강하게 운동을 하는 것을 돕는 것이다! 이 기회에 내가 꽉 막힌 어디 오리건의 히피 마음을 가지고 살아온 것을 깨닫는다.

소비에 대해 꼬인 심사의 기원

왜 이렇게 소비에 대해 마음이 꼬여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릴 때 본 영화가 떠오른다. ‘파이트클럽’

파이트 클럽을 처음 본 게 중학교 때 쯤이니 약 20년 전에 본 거다. 지금봐도 쿨한데 그땐 얼마나 멋지다고 느꼈을까? 아마 타일러 더든의 패션은 내 평소 날삘 나는 옷차림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멋진건 패션 뿐만 아니다. 답답한 틀에 박혀 사는 인간, 더이상 질문하기를 멈추고 허위에 순응하는 인간, 소비를 내맡긴 인간에 대한 비판을 하고 과격하지만 자유롭게 행동하고 말하는 타일러 더든은 그 누가 보기에도 쿨 할 수 밖에 없다. 그의 언행들 하나하나가 쿨한데 내가 큰 영향을 준 대사 중 하나를 옮기자면 타일러 더든이 버스 안 캘빈 클라인 팬티 광고를 보며 말한다. ‘꼭 저래야 남잔가?’, ‘헬스는 한심해’, ‘자기계발은 자위행위에 불과해’. 난 인생에서 캘빈 클라인 팬티를 산 적이 없으며 헬스는 쓸모 없는 자위 행위처럼 여겨져 꺼려했다 (나중에 와서 헬스가 재미있다는 걸 깨달았고 달리기를 즐겨하는 인생을 사고 있지만,,,).

Advertising has us chasing cars and clothes, working jobs we hate so we can buy shit we don't need. We're the middle children of history. No purpose or place. We have no Great War, No Great Depression. Our great war is a spiritual war. Our great depression is our lives. We've all been raised on television to believe that one day we'd all be millionaires and movie gods and rock stars, but we won't. We're slowly learning that fact. And we're very, very pissed off

영화 속 핵심 주제는 소비/물질주의에 예속된 삶에 대한 비판이다. 어릴 때 타일러 더든의 쿨함에 너무 반해버렸는지 난 어릴 때부터 소비에 대한 반감을 지니고 살아왔다. 언제부턴가 내 우상은 테드 카진스키였고 되도록 소비를 멀리하고 자연과 가까운 삶을 살고 싶었다.

다시 하프마라톤

말이 너무 샜다,,, 다시 하프로 돌아가자. 대회 전날 구미에 도착하고 대회 중 몸에 부착해야하는 배번을 수원에서 안 들고 온 것을 알게된다. 어쩌나 잠시 걱정하다가 그냥 내일 대회장 가서 고민하자 생각하고 잠이나 푹 잔다.

대회날 시민운동장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가득하다. 모두가 열심히 주변인과 해맑게 떠들고 사진 찍는 모습을 보니 내 기분도 한층 들뜬다. 지역의 작은 대회이다보니 대회 참여자 대부분 구미사람처럼 보인다. 동네 사람들과 함께 달릴 생각에 인생에 전혀 없던 애향심도 고취된다. 운영본부에 물으니 그냥 배번 없이 뛰라길래 ‘얏따!’를 외치며 대회에 참여했다.

시민 운동장 안의 트랙을 뛰며 준비 운동을 하다가 어릴 적에 이곳에서 달렸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생 때 다니던 검도학원이 시민 운동장 안에 있었는데 그때 난 종종 수업 전후에 시민운동장의 트랙을 달렸었다. 그렇게 뛰다보니 트랙을 돌던 동네 아저씨들이 옆에서 같이 뛰어주면서 말도 건네주고 칭찬도 해주셨다. ‘넌 달리는데 숨차서 힘들지 않니?‘라고 물으셨던 기억인데 그때 내가 ‘아뇨 숨차서 즐거워요!’라고 대답했었다. 아저씨가 ‘넌 달리기 인재구나!’ 비슷한 말을 하셨는데 인재까진 모르겠지만 달리기를 즐기는 성인이 되었다.

대회 시작할 때 약간의 비는 왔으나 달리기를 시작하자마자 비가 그쳐 해 없이 그늘진 길을 시원하게 달릴 수 있었다. 처음 시민 운동장을 나와 박정희 체육관 옆을 지나 수출탑을 향한다. 박정희 체육관은 아래 사진처럼 생겼는데 어릴 때 경부고속도로 하행을 타며 버섯집이다 버섯집!이라고 외치게 만든 건물이다.

수출탑 옆에는 2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마트와 그 후발 주자인 롯데마트와 홈플러스가 있다. 구미가 시골임에도 불구하고 대형마트가 꽤나 일찍 들어왔다. 이마트가 생기기 전에는 다들 대구에 대형마트를 갔어야했는데 이마트가 생기고 난 후 모두 이마트에 오다보니 마트가 무진장 붐볐던 기억이 난다. 이마트가 생긴 후 얼마 안 지나 차로 2분 거리에 롯데마트와 홈플러스가 동시에 생겼었는데 그 당시 뉴스에서도 구미에서 일어나는 대형마트 경쟁에 핫하게 다뤘던 기억이다.

수출탑에서 신평네거리를 지나 낙동강을 향한다. 길 자체는 별게 없었으나 문제는 내 달리기 페이스다. 내 평소 최고 페이스보다 km당 30초는 빠르게 달리고 있었는데 대회 참여의 뽕 때문이인지 몸이 잘 버텨주고 있었다. 이거 분명 후반 가면 문제가 생길 것 같은데 생각이 들다가도 보통 하프는 이 악물면 뛸 수 있다길래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렸는데 이게 후반에 큰 문제가 된다.

낙동강 코스는 생각보다 허전했다. 낙동강변이 서울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조용하고 고즈넉하면서도 웅장한 맛이 있는데 구미 중심부의 낙동강변은 공장이 가득하다보니 그렇게 시원한 맛은 없다. 낙동간 구간 중반까지는 페이스도 잘 유지하고 좋았지만 그 이후부터 다리가 무거워지고 달리기 페이스가 무척이나 떨이지기 시작한다. 아래는 예전에 찍은 낙동강변

낙동간 구간의 반은 동락공원이라는 큰 공원을 가로질러간다. 진짜 별 것 없는 공원인데 주말에 종종 가족끼리 가서 여가를 즐기곤 했던 곳이다.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기도 했고 자전거, 스케이트 보드를 타기도 했다. 어릴 때 탈 것을 타고 이 공원을 왕복하면 하루 종일 뿌듯했었는데 이제 이 곳을 달리고 있다. 아쉽게도 이때부터 다리가 무거워져서 가볍게 달리진 못했다.

마지막 구간은 다시 시민 운동장으로 돌아가는 긴 7~8km 길이의 직선 구간이다. 이때 다리가 완전히 잠겨있었다. 다리가 정말 무거워서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안간힘을 썼어야했고 발은 완전히 부어있어서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고통이 전신을 꿰뚫는다. 뭐 글로 적다보니 표현이 과장된 것 같지만 정말 힘들었다. 근데 힘든 것 자체는 괜찮았다. 몸 고통이야 잘 참는 편이라서 이렇게 계속 뛰어도 완주할 수 있으면 상관없다. 문제는 몸이 망가질 수 있다는거다. 이렇게 무리하다가 몸이 망가지면 달리기고 자시고 끝장이다. 멈춰야하나 말아야하나,,, 그 고민을 하면서 달렸는데 결국은 끝까지 달렸다. 흔히 말하는 도전 의식이나 성취를 위해서 달리진 않았고 그냥 몸이 어떻게 되나 궁금했다. 이번에 뛰고 몸이 맛이 가면 앞으로 마라톤은 포기하면 되는거다.

꾸역꾸역 몸을 끌고 시민 운동장에 도착한다. 가는 길에 이미 5km 완주를 끝낸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달리는 우리를 보고 화이팅을 외쳐주는데 그때 없던 힘도 생겨나더라. 그렇게 완주하고 기록을 보니 1시간 57분 25초. 목표로 했던 2시간 이내로 완주했으니 대만족이다.

완주하고나니 손발이 벌벌 떨리더라. 도착점에서 기다리던 가족들을 만나 잠시 떠들며 쉬다가 동생 부축을 받으며 겨우 집에 갔다.

뛸 때는 별 생각 없었는데 이렇게 적고보니 고향에 대한 사랑도, 달리기에 대한 사랑도 느낄 수 있다. 다행히 근육통 말고 몸에 이상은 없어서 달리기는 계속할 수 있을 듯하다. 다음에는 풀마라톤을 뛰련다.

달리기 대회 다음날 구미 옆에 있는 도개 온천이라는 곳을 갔다. 어릴 적 주말에 자주 가던 곳인데 이곳에 노천탕이 있어 운치가 좋다. 탕 내의 사진을 찍을 수는 없으니 노천탕에서 보이던 풍경을 사진으로 첨부한다. 이 날 눈이 와서 경치가 좋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