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먹으면서 주절댄 걸 친구가 좋아하길래 그냥 여기에도 옮겨서 써본다.
저번 주말에 춘천에 갔다. 밤 10시 반에 서울에서 출발하여 12시 좀 전에 서울에 도착했고 춘천에 있는 친구를 만나서 밥을 먹고 드라이브를 떠난다. 친구가 춘천에 소양강 댐이 예쁘다길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곳을 향한다. 네비가 안내해주는 길을 곧이 곧대로 따르지 않는다. 빠른 길 보다는 예쁠 것 같은 길이 좋기에 소양강을 따라 흐르는 길을 타고 거슬러오른다. 그러다 아름다운 강변의 공간을 발견하고는 바로 차를 멈춰 그곳의 물소리에 몸을 잠시 맡긴다. 다시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양강 댐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완전히 다른 세계에 진입하는 기분을 느낀다. 나와 친구 이외의 그 어떠한 인간의 소음이 없고 도시의 빛도 전혀 없는 완전한 고요. 분명 춘천 시내가 그렇게 멀지 않은데도 빛공해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 고요한 공간을 묵직하게 채우는 수많은 산들과 소양호의 희미한 빛이 무거운 공기에 섞여든다. 갑자기 큰 소리가 근처에서 울려퍼지고 어둠을 가르는 밝은 빛이 소양호를 가로지른다. 새벽 3시의 늦은,,, 혹은 이른 시간에 누군가 작은 배의 엔진을 점화하고 호수를 가른다. 그 모습을 보며 다짐한다. 나는 춘천에서 살거야. 소양호에 배를 하나 두고 밤에 혼자 소양호의 어둠 사이에 내 자리를 한 켠 만들거야. 그 틈 속에서 누워 밤하늘의 별을 볼거야.
해가 뜰 때 쯤에 소양강 댐을 떠나 배후령으로 향한다. 산길을 굽이굽이 오르는 길인데 길의 모든 코너에 스키드 마크가 있다. 폭주 뛰는 사람들이 자주 오는 곳 같길래 잔뜩 긴장했으나 다행히 토요일 새벽에 폭주를 뛰는 미친 인간들을 만나지는 않았다. 막상 도착한 배후령은 특별한 것은 없었다. 무슨 상관이 있나? 그냥 근처 숲 사이 길을 걷는다. 어스름에 랜턴 하나는 켜고 길을 걷는데 수없이 많은 벌레들이 주위를 웽웽거린다. 좀 거북하지만 그 벌레들이 팅커벨 같았다.
그러고 여정을 시마이쳐도 되지만 그냥 지도 북쪽에 보이는 호수에 가보기로 한다. 좋은 선택이었다. 하늘은 이미 꽤 밝아졌지만 구름이 잔뜩 끼여 세상은 노란빛, 하얀빛이 아닌 물의 색과 닮은 푸른 빛이었고 그 빛을 반사하는 호수는 마치 거대한 하늘의 빛을 모은 빛 운덩이 같다.
아직 여정을 끝내기는 아쉽다. 호수를 조금 더 두르다가 캠핑족이 가득한 공간을 향한다. 멋진 돌산과 그 옆을 흐르는 천을 옆에 두고 많은 차박족들이 아침밥을 차리거나 아침 운동을 하고 있다. 재미있게도 이 많은 캠핑 족들 사이에서 나와 친구가 제일 어렸다. 대부분 50대에서 60대 이상의 상대적으로 고령의 사람들이 이곳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맨날 젊은 사람들이 맵시 있게 캠핑을 하는 모습만 보았는데 알고보니 우리 인생의 선배님들은 더 좋은 곳만 다니신거다.
다시 여정을 오르고 호수를 더 두르다가 멋진 호수변의 공간도 발견하고 캠핑할 곳도 발견한다. 다음에 이 곳에서 캠핑할 것을 다짐하며 여정을 마무리한다.
난 항상 아름다운 곳을 잘 찾는다. 아름다운 노래도 잘 찾고 아름다운 공간도 잘 찾는다. 나에게 사람들이 항상 질문한다. ‘넌 어떻게 이런 노래들을 잘 알아?‘. ‘그런 곳들을 잘 찾아?‘. 나는 이런 질문들을 할 때 상대가 부러움을 내비칠 때 마음이 불편해진다. 전혀 부러울게 아닌데. 이건 그냥 내 삶의 궤적이야.
어떤 작품을 (혹은 프로젝트) 만들 때 처음에 나름에 완결된 기획을 만드려고 노력하지만 우리가 작품을 완성하고 창작물을 살펴보면 처음에 기획과 완전히 다른 부분도, 첫 기획에는 없던 수많은 디테일들이 작품에 가득 담겨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자신의 삶의 궤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혹은 자신 그 자체라고 말해도 된다. 그 무한한 디테일들은 소비 사회의 포화된 이미지의 해상도로는 담지 못한다. 오롯이 자신이 작품, 더 크게나 세상과 마주하는 시간의 결과물이며 그것의 삶의 궤적이다.
난 작품에 디테일에 담긴 삶의 궤적을 프랙탈에 빗대어 연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프랙탈 개념을 창시한 맨델브로트의 카오스에 대한 책 서문에서 영국의 해변의 길이를 재는 이야기가 나온다. 꼬불꼬불한 영국의 전체 해변의 정확한 길이는 몇 키로미터일까? 구글이나 ChatGPT한테 물으면 그 답이 바로 나오겠지만 그게 정확할까? 그냥 지도 수준의 해상도로 보이는 해안선의 길이를 측정한 것일 뿐 실제 자갈 하나까지 고려하여 해안선의 길이를 측정하려고 하면 정확한 길이를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된다. 자갈 하나하나를 고려하여 측정하려고 하면 더 작은 모래의 길이를 측정해야하는 것을 알게되고 이 이야기를 무한히 작은 단위를 측정하는 것으로 이어지게된다. 아쉽게도 두 점 사이를 직선으로 이어서 그 길이를 측정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사이에는 반복되지 않는 무한한 패턴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도 무료하고 뻔해보이지만 삶 사이에는 자신이 세상과 마주하면서 자신의 형태로 그리고 무한한 프랙탈이 담겨있다. 그게 나의 음악 취향이며 여행의 여정길이다. ‘삶’은 동사이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만의 궤적을 그려나가는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아쉬운 부분은 모든 것들이 상품화 되어있는 점이다. 상품을 정말 많은 것들을 보장해준다. 음식을 시켰을 때 음식이 맛있고, 우리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을 보장한다. 음식에 벌레가 없고 인체에 해로운 것들이 없다고 보장한다. 음식이 제 시간에 나오는 것을 보장하며 종업원이 음식을 내 얼굴에 쏟지 않는 것을 보장한다. 사실 우리의 삶의 모든 것들이 상품화되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은 것들을 보장 받는다. 행복, 만족, 편안함, 안전 같은 것들 말이다. 소비자이기도 하면서 상품이긴도 한 우리는 그 상품세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기에 보장 받지 않는 일들을 행하는 건 상상하지 못한다. 당연하게도 이런 보장들은 언제나 지켜지지 않고 상당 수의 경우 거짓인 경우가 많지만(아이폰의 마케팅 문구를 보자) 우린 상품의 환상을 잃지 않는다. 한 밤에 뜬 천개의 눈이 비추는 거짓을 못 본 척 하면서 말이다.
상품 사회를 온전히 부정하고 살 필요는 없다. 마르크스처럼 교환의 불가능성에 개입한 악마적 힘에 신음한다고 세상을 뒤엎거나 도망칠 필요는 없다. 누군가는 운동을 하겠지만 누군가는 유연하게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불합리함을 받아들일 때도 필요한 것이다. 마음이 불편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의 삶은 상품이 아니기에 삶이 불합리한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각자의 방식으로 그 불합리함에 대응하여 자신의 삶을 궤적을 그려나가면 된다. 눈동자 위로 명멸하는 화려한 상품 이미지의 환상을 꿰뚫는 진실의 빛을 세상에 발산하며 살아가면 된다.
아래는 사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