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타임

단지 OPN이 OST를 만들었다길래 봤다. 첫 장면부터 나오는 OPN 사운드는 압도적이었다. 바로 헤드폰을 끼고 봤다.

스포가 있고 내용 요약은 크게 하지 않으려고 한다. 영화를 본 사람이 읽기 좋을 듯하다.

영화는 빠르고 혼란스럽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주인공은 동생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동생의 정신 치료 기회를 잃게하고 은행 강도질에 동생을 동원하여 동생이 구치소에 갇히게 만든다. 주인공은 동생을 구치소에서 구한다는 목적으로 온갖 일들을 벌이고 그 선택의 대가로 위기가 찾아오고 또 그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일을 벌이고 다시 위기가 찾아오고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기 바쁘다. 주인공이 열심히 애쓰지만 옆에서 보기에는 무작위한 범죄만 저지르고 있다. 경찰 병원에 구속된 동생을 탈옥시키지를 않나, 경비원을 피떡이 되도록 구타하지를 않나, 주인공에게 현실감이 있긴 한건가 싶다.

모든 장면은 프로덕션 카메라 특유의 색보정을 거치니 과한 색조가 두드러지는데 이는 꿈 속의 무질서한 여정을 떠오르게도 하고 GTA5와 같은 게임 속 장면을 떠오르게도 한다. 또 종종 나오는 창문 너머 제 3자 시선의 장면들은 구경꾼, 방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영화는 관객들이 눈 앞에 벌어지는 끔찍하고 정신없는 장면들을 온전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등장 인물들에게 감정 이입을 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듯하다.

OPN의 전자음 사운드도 관객이 영화에 묘한 거리감을 느끼도록 애쓰는 듯하다. OPN이 기본적인 영화 음악의 문법을 지켜왔기에 꽤나 친숙하게 전달되는 음악의 서스펜스도 분명 있다. 하지만 공간감과 맞지 않은 과한 리버브(울림,반향), 사이렌과 각종 비프음 말고는 현실의 사운드 폰트와 전혀 다른 Line-out으로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신스음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 속 장면을 스크린에서 내리쬐는 이미지 그 자체로만 느끼게 만들고 이미지 속 인물들이 체스말로 보이게 만든다.

그런데 영화는 섬뜩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모든 인물들이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범죄를 저지르지만, 그 범죄에 따라오는 책임의 그림자는 섬뜩하게 짙고 선명하게 그려진다. 영화가 전개되고 주인공의 잇다른 범죄의 책임이 주인공에게 가까워질수록 주인공 눈에 드리우는 공포와 피곤함은 스크린을 찢고 관객의 눈을 찌른다. 주인공 주변에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도 무서울 정도로 현실적이다.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 싶은 정도로 주변 인물들이 마구잡이로 등장하고 소모적으로 이용된다. 입체적인 인물 같은 것도 없다. 근데 영화는 집요하게 그 주변 인물들을 현실적인 존재로 드러내기 위해 애쓴다. 영화를 유심히 보면 주인공의 대부분의 주변 인물들의 주거 공간을 찾아갔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주변 인물들의 가족들과 상호작용을 하고 그들의 삶의 모습을 목격한다. 잠시 나오는 주인공의 슈가마미(쯤 되려나?)의 부유한 집과 그 집에 거주하는 슈가마미의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와 슈가마미 갈등, 그리고 슈가마미의 현실 문제가 나온다. 슈가마미가 전개에 잠시 이용되는 캐릭터인 것을 생각하면 과하게 현실적이다. 주인공이 동생을 탈옥시키고 잠시 신세를 지는 흑인 할머니-손녀 가정 또한 마찬가지이다. 주인공이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을 찾는다는 핑계로 지나치게 그 집의 허름하고 빈곤한 미국 가정의 모습을 계속 보여준다. 주인공과 손녀가 티비에 나오는 미국경찰의 비인도적인 흑인 진압과 그로 인한 유혈사태를 보고서는 ‘이런 건 보기 싫으니 다른 채널로 돌리자’고 한 것처럼 우리는 앞서 말한 방관자의 마음으로 극렬하게 드러나는 리얼리티에서 심적 거리를 두고 고개를 돌리고 있다. 그런데 고개를 돌리고 있어도 마음 한켠은 불편하다.

다시 OPN의 음악으로 돌아가보자. 테크노는 매우 비정치적인 음악이다. 80-90년대 그 시작은 정치적일 지 모르나 지금은 비정치적이다. 테크노의 전자음은 짧은 호흡에 그 어떠한 유의미한 가사 없이 반복적으로 우리의 몸을 흔들게 만들기 바쁘다. OPN의 사운드는 프로그레시브 락적인 감정 서사가 있으나 여전히 감정 이외의 정치적 메세지는 찾기 어렵다. 이는 게임 같은 영화의 장면과 전개와 맞물려 우리가 영화 속 이미지를 비정치적으로 느끼도록 하지만 영화 속 이미지들은 섬뜩할 정도로 현실적이고 정치적이다.

주인공이 단순히 어리석기에 끝없이 잘못된 선택을 한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인공이 두려움과 공포에 내몰려 자기 주변을 잃고 자기 세계를 잃어가는 모습은 영화 밖 현실에서 많이 본 것만 같다.

영화를 보고나니 내 등 뒤에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가 느껴진다. 그 그림자는 가깝게는 일상, 직장, 친구, 월급, 대출, 연애 같은 것들에서 오는 그림자이고 멀리로는 환경 문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윤석열-이재명, 저출산, 한국 경기 침체 등의 거대한 것들에서 오는 그림자이다. 가까운 그림자도 문제지만 멀리 있는 문제들은 해결할 방법도 모르고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안 든다. 어떤 것들(특히 저출산)은 분명 내 가까운 현실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을 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뉴스의 자료화면의 문자와 이미지로 치부하고 못 본 척한다. 내 등 뒤에 그림자가 모든 빛을 잡아먹는 블랙홀이 되고 있는 건 뻔히 알지만 고개를 돌리지 못한다. 사실 고개를 돌려봐야 뭐하겠는가. 68혁명이라도 벌일 것인가?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에 대해서 기껏해야 술자리에서 열내면서 이야기 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정치적인 행동이 뭐가 있는가? 현실 주인공이 위기를 해결하는게 아니라 벗어나기 급급한 것처럼, 끔찍한 현실이 나오는 티비 채널을 돌린 것처럼, 영화 속 선명한 현실을 그냥 영화 속 장면으로 치부하고 싶던 관객의 마음처럼, 우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테크노를 들으며 비정치적인 춤을 춘다. 마음 한켠이 불편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