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노트

군대를 갔다온 후 가장 큰 변화는 종이에다가 글을 쓰는거다. 

이전까지는 컴퓨터에 글을 써왔었는데 그게 장점 보다는 단점이 많았다. 장점은 역시 애플 메모 클라우드 덕에 사실상 영구(?) 보존, 검색 및 원하는 메모를 언제든 접근, 손 안 아픔, 악필 free 같은 이유가 있다. 뭐 것보다는 대컴퓨터용휴먼인터페이스라는 직업 의식 때문에 컴퓨터로 써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점이 많았는데 가장 큰 문제는 엎드려서 노트북을 두드리면 허리가 아프고 손목이 꺾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앉아서 작업하길 요구했고 와식 라이프의 표준을 준수하는 나로써는 글 쓰려고 의자에 앉는게 매우 귀찮았다. 사실 또다른 큰 문제가 있는데 컴퓨터에 노트를 켜고 새하얗거나 시꺼먼 빈 스크린 위에 점멸하는 텍스트 커서를 보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번쩍번쩍 커서가 점멸할 때마다 날 재촉하는 것 같다. 

훈련소에서 당연 컴터를 못 쓰니 공책에다가 글을 썼는데 놀랄 정도로 글이 쉽게 써진다. 그냥 누워서 종이에 단어 하나만 적으면 한페이지가 그냥 넘어간다. 그때서야 깨닫는다. 아 노캐리어!

말없이 내던져진 자신을 보면서도

여전히 그 앞에 앉아서 두드렸어

어떻게 된것 아냐 벗어날 수도 없어

열리지 않는다는 그 맘을 알면서도

오늘도 네앞에 다가서 웃어봤어

무슨말 하려해도 아무소리가 안나

내게 들려줄 그대답은 오직 노 캐리어

내게 보여줄 그대답은 오직 노 캐리어

델리스파이스의 노캐리어 가사처럼 키보드는 두드려도 뭔가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No carrier.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이동통신사 없음, 핸드폰 신호를 못 잡음 정도의 의미 정도이다. 내 마음 속의 생각과 글 사이에 키보드(컴퓨터)는 그렇게 좋은 이통사가 아니었다. 연결이 되다말다 하고 때에 따라서는 거의 연결이 안 된다. 그런 노캐리어 상태에서 글을 쓰려했던거다. 

종이에 글을 쓰고 난 이후 매일매일 종이에다 뭔가를 쏟아낸다. 그러다보니 또 새로운 사실 하나를 깨닫는데 나는 뭔가 마음 속에 생각을 말이든 글이든 표현을 못하면 그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서는 나가지를 않는 것이다. 내 마음의 땅을 매매한 것도 아니고 굳이 따지면 임대해준 것인데 이 놈의 생각이라는 것이 나가지 않고 자기 땅인양 불법 점거를 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쌓이다보니 마음은 지저분한 컴퓨터 바탕화면처럼 난잡하고 생각도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근데 글을 그냥 갈겨버리니 마음에 불법 주거하던 생각들이 손 끝으로 같이 빠져나갔다. 생각이 빠지고 나서야 생각이 쌓였었다는 걸 알게되고 생각이 쌓이면 꽤나 불편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냥 요즘은 뭔가 생각이 들면 빠르게 종이에 휘갈긴다. 점심 먹고 남는 20분 정도 시간에도 뭔가를 적어대면 꽤나 마음이 편안해진다.

요 몇년 멍청해졌나 싶었는데 그냥 생각경색이랄까, 생각이 막혔던 것이다. 글을 성실히 쓰다보니 생각이 막히지 않고 흐른다. 생각이 흐리니 자유로워진다. 

내 성격이 그렇듯 뭔가에 빠지면 집착하게 된다. 뭔가 생각이 들면 빨리 글을 쓰고 싶어해고 언제든 글을 쓰기 위해서 노트를 항상 휴대하고 다닌다. 그리고 밤에 글을 쓸 에너지나 여유가 없어지는 것을 극도로 꺼리게된다. 예를들면 써야할 생각이 있으면 술 약속도 피하고, 술 약속을 가더라도 글을 쓸 정도의 정신을 남겨둔다.

이제 이 글을 굳이 블로그에 올리는 이유에 가까워졌다. 최근에 노트를 거의 다 써서 미리 다이소에서 A5 노트을 샀는데 그게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왜 안 보이지,,, 찾아도 찾아도 안 보인다,,, 또 병 도져서 마음이 불안해진다. 아 노트 다 썼었을 때 새로 쓸 노트가 없으면 어쩌지. 유튜브에 있는 뭔 병신 같은 헤어진 연인이 돌아오는 주파수처럼 떠나간 내 노트가 돌아오는 주파수를 갈망하는 지경에 이른다. 

결국 다이소에서 노트를 다시 산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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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같다,,,

짜증나서 20분 간 혼자 욕하다가 다시 새 노트를 사러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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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

새로 산 A5 공책은 그럭저럭 마음에 든다. 뭐 그렇게 뒷면이 비치지도 않고 앞에 펜톤 뭐시기스러운 디자인이 웃기긴 하지만 그나마 심플해서 좋다. 제발 A5, 50매, 스프링 작고, 종이 뒷면 안 비치고, 표지에 아무 것도 없는 심플, 컴팩트한 노트 좀 만들어줘라,,,, 그리고 잊지말자 뒷면이 안 비치는 종이무게는 80g 이상이다. 저 노트는 85g.

다음에는 펄이 박힌 고급 노트라도 사야할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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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산 플러스펜도 마음에 든다. 원래 플러스펜을 좋아하는데 손잡이가 얇아서 너무 손이 아팠다. 그래서 8000원 짜리 비싼 펜텔 트라디오를 계속 써왔는데 900원 짜리 이 녀석이 펜촉이 얇아서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