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게리온에 TV판 11화 마지막 쯤에서 제3동경시를 바라보며 레이가 이런 말을 한다. ‘인간은 어둠이 두려워서 불을 써서 어둠을 물리치며 살아왔어’.
사람들은 태양 빛에 의해 빛나는 모든 것들이 견고하고 영원할 것이라고 믿고 낮을 보낸다. 사람들이 태양 빛에 홀린 낮을 지내면 밤이 찾아온다. 눈을 빈틈없이, 그리고 쉴 틈 없이 가득 채우던 빛을 밤이 거두고나면 남는 것은 채울 수 없는 여백이다. 그 여백을 마주하게 되면 수천개의 생각과 감정들이 든다. 재즈 스탠다드인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의 첫부분 가사에서 말하듯 낮에 진실인 양 믿고 싶은 것들도 밤에는 그 진실이 드러난다. 아래에 해당 가사를 첨부한다.
Don't whisper things to me you don't mean
For words deep down inside can be seen by the night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
And it knows the truth apart from one that lies
낮에 우리가 진실인 양 믿고 싶은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적어도 당장은 환경파괴로 지구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길 걷다가 신호 위반을 하는 차에 치여 내일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믿음? 눈 앞에 보이는 말과 사람과 문제를 해결하고 살다보면 내일은, 적어도 몇년 후에는 행복할 수 있을거라는 믿음? 영원이 늙음이 오지 않을거라는 믿음? 나의 사랑이 나와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는 믿음? 우린 이런 믿음들을 은연 중에 가지며 살아가고 이 믿음들이 인류를 돌리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그런데 눈 앞에 빛들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불안해진다. 밤과 잠은 영원한 빈틈이다. 그 빈틈은 마주했을 때 인간은 질문하게 된다. 우리의 믿음이 옳은 것일까? 낮에는 바보인 양 풍차에 달려들고 밤에는 믿음을 의심하는 일을 반복하는게 인간의 인생일 지도 모른다.
밤의 빈틈은 태양 빛 아래에 있었던 일들을 게걸스럽게 삼킨다. 그리고 질문을 만든다. ‘그게 다 진실일까?’, ‘이게 다 영원할까?‘. 우린 그 질문들을 계속 내던지면 꿈을 꾼다. 다른 삶을, 다른 내일을, 다른 관계를, 다른 가능성으로 밤에 빈틈을 가득 채우고 꿈을 꾼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태양 빛 아래 내던지며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인류를 유지하는 것이 태양 빛이라면 인간을 발전시키는건 밤의 어둠이다.
지금 우리 시대의 인간에게는 밤이 있을까? 밤을 환하게 비추는 휴대폰, 티비, 가로등, 간판의 빛들은 밤의 빈틈을 가득 메운다. 말그대로 불야성이다. 단지 빛들이 전부가 아니다. 소비사회는 이제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 녹아들어 소비로 행복을 살 수 있다고 약속한다. 더이상 빈틈은 없다. 정말로 매끈하고 무결한 세상 뿐이다.
이 매끈한 세상에 흠을 내고 싶다. 그래서 일상과 일상 사이에 틈을 만들기 위해 모든 빛을 거두어들인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 꿈을 꾼다. 햇빛이 닿지 않는 어둠의 빈틈에서 빛나는 수천의 별빛을 한 글자, 한 글자씩 담아본다.
첨부한 곡은 가장 좋아하는 Night has a Thousand Eyes. 16분 16초에 해당 트랙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