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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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간 퇴근을 하면서 건물 밖을 나서는데 공기의 향기가 너무나 좋다. 신기하게도 밤 공기의 향기는 내 몸에서 나는 냄새랑 닮았다. 바깥 바람에 몸의 냄새가 퍼져서 내 몸 냄새가 나는걸까? 아니면 우연히도 두 냄새가 닮은걸까?

어릴 적 밤산책을 많이 했었다. 밤이 되면 그냥 혼자 걸었다. 어디로 향하는 지는 모르지만 걸을 수 있을만큼 걸었다. 딱히 학교 생활에 큰 관심이 없었기에 그러고 살았었다. 왜 그렇게 걸었는지 그때는 몰랐다. 나중에 와서야 내 인생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것인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오늘에서야 확신한다. 나는 그냥 밤이 좋고 밤에 걷는게 좋다.

참 현실감 없는 인생을 살아왔다.

고등학교 시절에 수능 공부를 했지만 좋은 대학은 가고 싶다던지, 더 나은 인생을 살고 싶다던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수능 공부를 하지는 않았다. 그냥 공부가 재미있었다. 그래서 공부를 했고 수능을 쳤다. 대학을 가고 싶다는 열망은 없었다. 뭐 수능 결과는 좋지 못 해서 생각보다 안 좋은 학교를 왔지만 딱히 재수니 반수니 생각을 하고 살지는 않았다. 불만은 있었지만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대학교 시절도 같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꽤 많은 재미있는 일을 해왔지만 언제나 진심으로 그것들을 내 안에 안고 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강의도 학점도 대외 활동도 사교도 그렇게 관심이 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랑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다른 세계에 있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마치 남의 집에 방문하듯이, 전시를 구경하듯이 주변 세계에 관계를 맺은 것 같다. 아니면 밤손님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대학 생활은 행복했다. 마음껏 술 먹고 밤산책을 즐기고 많은 것들을 구경하고 많은 것들을 방문하고 책도 정말 많이 읽고 영화도 많이 봤다. 이제는 다 흩어져 사라져버렸지만 말도 정말 많았다.

저번에 3월인가 플레이리스트에도 썼듯이 현실적인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지도 못 했고 이해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현실에 다가가지 않으면 세상은 마치 꿈과 같다. 땅 위를 투벅투벅 걷지만 땅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듯한 느낌이다. 많은 것들은 내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환영 같다. 세상에 발 붙이지 못해서 불안했고, 현실감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죄책감을 느껴왔는데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도시는 환영의 공간이다. 실존하지도 않는 가치가 물질화되고, 물질화된 그것에 또다른 가상의 가치가 부여되버린다. 그렇게 가상의 가치-물질화-가상의 가치-물질화… 도식 반복되다보면 도시가 만들어진다. 어느새 견고해진 그 모습이 실제처럼 보이지만 도시에서 실제하는 건 사람 뿐이다. 나에게 도시는 환영이었고 발 붙일 수가 없는 곳이었다.

꿈의 노벨레 속 주인공처럼(혹은 아이즈 와이드 셧의 톰 크루즈) 밤의 환영을 즐겼다. 환영의 군무를 구경하고, 술을 마셨다. 잠시 환영에 몸을 맡겨 하룻밤 동안 환상에 속해본다. 그러고는 다시 모든 일이 없었는 양 집으로 돌아간다. 무슨 일이 있었건 환영은 환영일 뿐이다. 노래 Felicidade 가사 속 카니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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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재미있는 짤을 발견했다. 창문에 Directed by David Lynch 붙여놓으면 세상이 납득이 간단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보니 세상이 납득이 간다. 앞으로도 현실감 없이 환영 속에서 살거다. 뭐 어떤가? 현실인 척 살건, 환영 속에 살건, 살기만 하면 그만이다. 나는 세상이 환영이라고 생각하니까 재미있고 더 열심히 살고 싶어지는걸. 환영을 헤엄치며 물고기를 잡으며 살련다.

데이빗 린치 영화나 다시 봐야겠다.

아래는 데이빗 린치의 Catching the Bigfish의 서문에 적힌 글이다.

Ideas are like fish.

If you want to catch little fish, you can stay in the shallow water. But if you want to catch the big fish, you’ve got to go deeper.

Down deep, the fish are more powerful and more pure. They’re huge and abstract. And they’re very beautif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