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캐리어

글을 써야한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예전에 봤던 성격 테스트인가 하는거에서 나에게 말해주기를 나는 절대로 생각을 정리해서 글을 남기지 않으며 당장 떠오르는 것을 되는대로 말하고 치우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말 일단 뱉고 본다는 말인데 정말로 공감이 가는 부분이었다. 평소에 그렇게 생각을 열심히 하고 사는 것 같지 않다. 뭐 공부하는 입장이니 공부할 때는 생각을 좀 하는 척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이외의 시간에는 꽤나 멍하다. 가만히 그냥 음악을 들으면서 시간이 내 몸을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평소에는 생각없이 멍하니 살다가도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에는 잔재주를 부리기 시작한다. 즉석해서 당장에 떠오르는 키워드들을 가지고 이리저리 내 멋대로 조합한다. 이때 그 조합 관계는 내가 요즘 집중하는 이야기들의 관계도를 따라간다. 이렇게 즉석으로 이야기를 만든 후 논리적으로 모자란 부분이 있는 지 테스트한다. 이때 완전히 논리적으로 엉성한 이야기이면 그냥 입을 닥치고, 조금 부족하더라도 그냥저냥 들어줄 수 있겠다 싶으면 뱉어버린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상대방이 반응을 해준다. 이때 여러가지의 반응들이 나오지만 이때도 적당히 위와 같은 말하기 방식으로 하다보면 적당히 대화는 끝난다. 나는 이 대화를 통해 평소에 하지도 않는 생각을 하는 척을 했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내가 생각했다고 믿게 하기 위해 잠시나마 생각을 했다. 대부분의 내가 생각했다고 하는 것들은 다 이런 식인 것 같다. 그 상황상황에 대충 떠오르는 것을 나만의 방식으로 짜맞추어서 밀어붙이는 것이다. 뭐 그렇다고 재치가 있거나 한 사람도 아니지만…. 이 같이 생각에 게으른 내가 생각을 한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뛸 때와 글 쓸 때이다. 

달리기를 좋아한다. 성실히 달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달릴 때 기분은 언제나 최고이다. 평소에는 단지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걷거나 하는 등의 일상 생활을 위해 봉사하는 근육들이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킬 때에는 기분이 묘하다. 새삼 나는 육체를 가지고 있구나 느낄 수 있어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이 같은 표현만으로는 내가 달리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러닝머신을 싫어하는 것이 그 단서이다. 러닝머신 위에서 5분 이상 달린 적이 없는 것 같다. 이 단서는 너무나도 명백하게 내가 달리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나는 달릴 때 잠시나마 세계를 평소와는 다른 방식으로 마주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공간을 달리 마주한다는 표현을 쉽게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히 달릴 때는 내가 존재하는 공간이 달라진다. 평소에는 자각하지 못했던 시간이 순간과 순간 사이를 이어준다. 그 시간과 시간으로 이어진 공간들은 조금은 생동감 있게 또 조금은 무게감 있게 나를 받아들인다. 얼굴을 감싸는 바람은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내 몸은 공간과 일종의 대화를 하는 것 같다. 조금씩 조금씩 한 발 한 발 뛸 때마다 계속 해서 대화가 오간다. 무슨 대화를 하냐고? 그건 언어로 표현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궁금하면 나랑 같이 뛰어보면 알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달릴 때 왜 생각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봐야한다. 왜 생각을 하는가는 분명하다. 내 몸을 열었기 때문이다. 앞서의 이야기처럼 달릴 때 나의 감각을 완전히 열렸고 나의 온 육체는 바깥 세상과 교류를 나눈다. 나의 정신은 이 교류를 받아들이고 또 처리한다. 이 과정이 곧 생각이다. 그럼 이때 무슨 생각을 하는가 하면 사실 나도 모른다. 달릴 때 꽤나 많은 생각을 하는 것 같기는 하다. 마치 컴퓨터의 클럭과 같이 한 발 한 발의 주기로 탁탁탁탁 리듬감 있게 생각이 흘러간다. 하지만 아까의 모호한 표현대로 몸과 세상의 대화는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속성의 것이다. 아마 이때의 생각들도 언어와 비언어 사이의 어떤 것이 나의 몸과 정신(이렇게 구분해서 부를 수 있는 지는 정말로 모르겠다) 사이를 오가는 것 같다. 

나는 사실 걸을 때도 생각을 하곤 한다. 이때의 생각은 달릴 때와 비슷하기도 하며 다르기도 하다. 차이와 반복이라고 했던가? 달릴 때와 비교를 하면 걸을 때에는 조금 더 쳐지고 조금 더 생각이 따뜻하다. 절대로 타인에게 온정적이다라는 의미에서 따뜻하다는 것은 아니다. 조금 더 생각이 감정적이고, 살짝은 열정적이다. 하지만 불타오르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때의 생각들은 좀 더 언어적이며, 조금 더 내 기억과 많은 접촉을 한다. 그리고 달릴 때와 같이 주변의 공간을 온 몸으로 느끼기 보다, 공간의 빛을 눈으로 받아들이기 바쁘다. 내가 예전에 했던 멍청한 짓거리들을 떠올릴 때도 있고 내가 예전에 이 공간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떠올리기도 한다. 내 눈 앞 빛들을 또 어떤 사람들이 바라볼까 생각하고, 그들은 이 빛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 수많은 빛들을 잇는 관계들을 생각한다. 어떤 관계는 개인이 만들고, 어떤 관계는 사회나 시스템이 만들고, 또 어떤 관계는 자연이 만들고, 어떤 관계는 내가 만든다. 그렇게 자꾸 생각한다.

잠시 삼천포로 빠져보자면 예전에 바에서 만난 친구가 나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 날은 학부 마지막 셤이 끝난 날이었다. 친구와 같이 만선호프를 갔고 남산을 올랐고 그러다 새벽에 록시에 갔었다. 그곳에서 놀다가 스웨덴인가 노르웨인인가에서 온 친구 둘을 만났고 그 둘 중 한명이랑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 친구는 맥주 한병을 사주며 나의 학부 마지막 날을 축하해줬었다. 그렇게 놀다가 그 친구가 담배를 피우러 나갔고 그를 따라 나섰다. 그때 그 친구가 담배를 피우며 담배 예찬론을 펼쳤었다. 아니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일’에 대한 예찬론을 펼쳤다. 그는 담배를 자주 피우지 않는다고 한다. 담배의 향이나 느낌 자체를 그리 즐기지도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담배를 피우러 나오는 moment를 즐긴다고 한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 장소를 전환하고 또 상황을 전환시키는 일이 좋다고 한다. 마치 context switching 하는 것과 같이 담배를 피우러 나오면서 생각이 바뀌고 또 주변 공간을 느낄 수 있어서 즐겁다고 한다. 

글을 쓸 때에는 또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글은 언어적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일이고 언어는 많은 규약들이 따라온다. 이 규약은 내가 느끼기에 글쓰기에는 기본적으로 타인이 행위 주체에 포함되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어떻게 타인이 인식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인간들의 많은 고민이 있어왔고 현재의 대부분의 글쓰기나 생각의 방식을 지배하는 법칙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됐을 것 같다. 논리적이어야하며 기승전결이 있어야하고 어느 정도의 내러티브도 있어야한다. 평소에 나 자신이 이런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글을 쓰기 위해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는 순간 모든 것은 사라진다. 여러 법칙을 알고 있다고 믿었지만 그 법칙들은 계속 두드리는 키보드 위에서 흩날리고 또 사라져버린다. 쓰고 싶은 것은 많지만 내 눈 앞의 화면은 시간이 지나도록 비어있다. 커서만 잠시 좌우로 움직일 뿐이다. 이렇게 있다보면 마치 컴퓨터랑 대화를 시도하지만 대화가 불가능한 것 같다. 델리 스파이스의 1집 1번 트랙이 생각난다. 글은 더 진지한 활동인 것 같다. 여기서 진지하다는 의미는 천년의 세월 동안 물이 흘러 생긴 돌 위의 물 길을 틀어버리기 위한 힘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과감하게, 하지만 또 부드럽게, 멀리보며, 꾸준하게, 만지고 또 느껴야하는 일 같다. 이런 과정을 거쳤을 때 나의 손에서 조금 더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