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나에 대해 소개를 요구하며 취미를 물을 때마다 조금 당혹스럽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요즘 사회에서 취미는 개인의 개성을 드러내는 정보이다. 뜬금없이 이야기하자면 개인의 시대가 시장, 상품의 시대가 오면서 개인의 개성을 가지는 것이 그 존재의 이유를 증명하는 듯한 느낌을 주게 되고, 개성 없는 사람은 곧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 같다. 모두가 열심히 무개성의 생산 활동을 하고 난 이후, 여가 시간 동안 개성 넘치는 취미 활동을 해야한다. 빛나는 취미 생활을 하지 못한 주말은 마냥 자랑스럽지는 못하다. 여기저기 구멍이 넘쳐나는 이야기이지만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이 아니기에 그냥 헛소리 하는구나 하고 넘어가줬으면 좋겠다. 다시 돌아가서 어쨌거나 나의 취미는 ‘음악 듣기, 영화 보기, 책 읽기, 게임 하기, 산책 하기’이다. 취미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1초 안에 생각나는 것은 저것들이 전부이다. 뭐 그렇게 특별할 건 없는 것 같지만 정말로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평생을 가져온 취미이며 앞으로도 저 이외의 취미를 가질 것 같지는 않다. 저 중 내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취미는 역시나 음악 듣기이다.
음악을 정말로 쉴 새 없이 듣는 편에 속한다. 사실 음악이야 맥루한 식으로 말하자면 정말로 핫미디어에 속하다보니 보내는 시간이 많을 수 밖에 없다. 지금 당장도 음악을 들으면서 글을 쓰고 있으니 말을 다했다. 참고로 지금 듣고 있는 노래는 Joao Gilberto의 Bim Bom. 음악은 정말 나의 모든 일상을 함께한다. 아침에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릴 때, 샤워를 할 때, 지하철을 탈 때, 코딩을 할 때, 뒹굴거릴 때, 책을 읽을 때, 자기 전에, 영화를 볼 때, 카페에 있을 때, 뭐 말도 말자. 그냥 내가 안 틀어도 나오는게 음악이다. 사실 바깥에서 음악이 안 나와도 내 머릿속에서 음악이 흐르는데 음악이 없을 때가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해보면 음악은 나, 더 나아가 이 세상의 보편 인간에게 중요한 인생의 한부분임이 틀림 없다. 그럼 내 인생에서 음악이랑 어떤 관계를 맺어 왔을까? 분명 좋은 관계인 것 같다.
음악은 아마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흘렀을 것이다. 어머니의 배, 양수도 분명 매질이니까 어머니가 듣던 뭐 태교용 모짜르트를 듣지 않았을까? 분명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집에 Mozart effect 음반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음악들은 전혀 기억도 못 하겠고 나에게 무슨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혹시 내가 어릴 적 태교로 들은 음악 덕에 지금과 같은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나의 음악의 시작은 태어난 이후 부모님이 자주 틀었던 음반들이다. 집에는 Marantz 시디 플레이어와 잘 기억 안 나는 앰프가 있었고folk audio 북쉘프 오디오가 한짝 있었다. 부모님은 자주 음악을 틀으셨고 그때 들었던 음악들은 그 어느 음악들 보다도 특별하다. 그 음악들을 지금 들으면 정말 순간적 가슴이 가벼워지면서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 그 순간은 정말로 무한하다. 모든 것이 충족되고, 그 이상은 없다. 조금 더 원초적이면서 동시에 회귀하는 기분을 준다. 단순히 과거의 기억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나의 가장 처음 음악에 대한 감각 형성의 순간을 잠시나마 바라보게 해준다. 나의 바탕이 되는 순간들. 나에게 익숙한 것들. 내가 편안한 것들이 만들어지는 그 처음에 탄생의 순간. 대체될 수도 없고, 앞으로 다시 있을 수도 없는 그 닿기 어려운 그 순간을 본다. 이 같은 순간들을 난 갈망한다. 꼭 그때 들었던 음악일 필요는 없다. 그때 음악의 느낌을 받으면 된다. 음의 분위기, 음과 함께 나에게 오는 이미지나 향기, 촉감, 미묘한 공기가 그 순간과 유사해도 좋다. 나는 정말로 그 무한한 느낌을 사랑한다. 사실 잘 생각해보면 이때의 느낌은 카오스를 떠올리게 한다. 분명 어릴 적 처음 음악을 들을 때는 언어적 훈련이 덜 되어있었을테며 모든 감각은 새로우며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변하며, 그 변하는 것을 강렬하게 볼 수 있었던 것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은 나의 개성의 표출이었다. 과거의 기억은 확실히 말할 수 없는 것이지만 사람의 마음이 흘러가는 법칙은 상당히 뻔하고 그때 전반적인 내 상황들을 보건데 음악을 들을 때 내가 바라던 마음은 정말 특별하고 다르고 싶다라는 감정이었음이 분명하다. 나는 그때 리얼 찐따였고 외로웠다. 그때 나는 모든 면에서 보편에서는 많이 벗어났다. 발음은 리얼 이상해서 아무도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으며 축구를 하지 않았고 또 남과 잘 어울리는 성격이 아니었을 뿐더러 소심했다. 덕분에 친구가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의 시간은 혼자 공상하거나 게임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여기서 찐따근성이 드러난다. 외로워서 남과 교류하고 싶으면 그러기 위해서 노력하면 되는데 그러지는 않고 남과 어울리지 않는 이유는 내가 특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나는 남들과 다르고, 남들보다 더 나은 존재이며 더 많은 것을 즐기는 존재이기에 타인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뭘 더 즐기냐면 음악을 더 즐기고, 게임을 더 즐겼던 것 같다. 내가 특별해질 수 있는 음악을 들으려고 했다. 사람이 무언가 특별하고자 애를 쓰면 그저 본인 눈 앞에 보이는 것과 조금 다른 일을 할 뿐 별로 특별해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초등학생의 나 또한 특별하려 했지만 평범하게 트로트를 듣고 팝송을 들었던 것 같다. 물론 그때는 특별하다고 생각했는데 왜나하면 내 또래는 그것을 듣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트로트를 듣고 있던 내 모습을 생각하니 좀 웃기긴 하다. 어쨌거나 트로트를 꽤 자주 들었고 당시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랑 트로트 이야기도 꽤 많이 했다. 조금 웃긴게 그 선생님도 그때 나이가 20 후반의 젊은 남선생님이셨는데 트로트를 좋아하셨고 내가 트로트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했을 때 조금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뭐 트로트는 그리 오래 듣지는 않았고 사실 그 이후 다시는 듣지 않았다. 나의 진정한 음악 취향의 원류이자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건 팝송이다. 초등학교 4학년인가 때부터 있던 mp3에는 항상 팝송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들었던게 아마 sweet box, usher, britney spears, kelly clarkson, evanescence 뭐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빌보드 차트를 챙겨보고 mtv 영상을 찾아봤다. 팝송이 정말로 좋은게 내 주변 애들은 듣지 않지만, 전 세계 사람들이 듣기에 그 인기로 그 가치가 보장된다. 나는 팝송 덕에 주변 또래들과는 다르게 더 멋지고 빛나는 것을 좋아하는 인간이 될 수 있었다. 멋진 신문물을 보고 좋아하는 모던 보이이자 힙스터 같은거였다. 그렇게 노선을 정하고 팝송을 듣다가 어느 날 비틀즈를 접하고, 이후 다양한 음악을 듣게 된 것 같다. 물론 비틀즈를 단지 특별하지기 위한 욕망으로 들었다고 할 수는 없다. 비틀즈는 정말로 특별하니까.
음악하면 떠오르는 어릴 적 생각이 있다. 어릴 때 머릿 속에서 음악이 멈추지 않았다. 특히나 하교 길에 혼자 집에 돌아갈 때는 정말로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 없었다. 뭐 음악이 흘러나온다고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정말로 멈추려고 하는데도 멈출 수 없다는 건 정말로 짜증났다. 음악을 멈춰보려고 애를 많이 썼던 것 같다. 귀를 막아보고, 귀를 막고 소리를 질러보고, 주변에 다른 소리를 집중해보려고 했다. 뭐 이런 걸로 되지 않으니 뛰어도 보고 혼자 말도 해봤던 것 같다. 그래도 안 되니 음악이라는 것이 더 상위의 세계에서 흘러나오는 건 아닌가 혹은 영적인 증표 같은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마음의 흐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멈추려고 해도 거역하기 힘든 그 에너지의 흐름과 방향. 내 주변 모든 것에 시간을 부여하는 그 힘은 무작정 부정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 지금으로 말하자면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요, 그대의 마음이다’와 비슷한 류의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내 마음의 흐름을 바라보고 나니 음악이 멈추었던 것 같다. 물론 예전에 이거랑 똑같이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지만 맥락은 비슷한 것 같다. 그렇기에 동사서독에서 움직이는 뭐시기 대사를 들었을 때 마음이 크게 동했던 것 같다.
공간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은 항상 좋은 것 같다. 예를 들면 비틀즈의 strawberry fields forever를 들을 때면 언제나 반지의 제왕이 생각난다.(참고로 love 앨범 버전이다) 엘프의 숲이 생각나는 것 같기도 하고 봄바딜이 있던 숲 같기도 하고 정확히 특정 짓지는 못하겠다. 아니면 마룬 5 2집 1번을 들으면 시부야가 생각난다. 좀 더 뻔한 걸로는california dreaming을 들으면 홍콩이 생각난다. 보사노바를 들을 때는 정말로 해변 옆의 집에서 코딩하면서 행복해하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하루오미 호소노의 노래를 들을 때는 정말로 대마에 냄새가 쩔은 방과 그 안의 무기력한 히피들이 뒹구는 모습이 생각난다. 롤러코스터의 노래를 들으면 2000년 대의 대학로가 떠오른다.
나는 게임 음악을 정말로 좋아한다. 나의 취미는 게임이고 또 게임 음악을 듣는 것이다. 게임 속 음악은 보통 듣는 음악이랑 본질적으로 다르다. 게임의 음악은 내가 게임과 함께한 시간의 증표이다. 좋은 게임은 나를 그 게임 속 세상으로 납치해버린다. 나는 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며 즐거워하고 그 속의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느끼고 즐긴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언젠가는 그 게임 속 세계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오게 되고 그 세계는 잊혀져버린다. 그렇게 까먹고 지내다가 게임 음악을 듣는 순간 게임 속 세계로 다시 돌아가게 되고 게임을 할 때 느꼈던 그 기쁨을 다시 느끼게 된다. 이번 글에 첨부하는 음악은 젤다의 lost woods에 나오는 노래이다. Lost woods는 시간의 오카리나 제일 처음 시작하는 마을 바로 옆에 있는 지역인데 이 숲은 정말로 신비롭다. 동서남북이나 방향 개념이 불분명해서 분명 마을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도 마을이 다시 나오고 그러다가도 이상한 공간이 나온다. 방향 감각이 좋은 사람으로서 방향이 틀리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길을 헤매는 일은 정말로 짜증나면서도 즐거운 경험이었고 그 신비로운 숲에 경외감을 가졌었다. 이 노래를 들으며 바로 느껴지는 이 신비로움은 그때 내가 헤매던 시간의 증표이다.
어릴 적 팝송을 들었던 이유가 힙 근성이라면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뭐 어릴 적 그 근성 어디 가겠냐만은 이젠 나의 취향으로 나를 표출할 필요성이 사라지다보니 음악을 예전과는 다르게 들을 수 있는 것 같다. 지금의 음악 취향에 대해서는 쉽게 말할 수 없다. 그냥 좋은 노래가 좋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거나, 좋아하는 영화에 나오거나, 좋아하는 공간을 떠올리게 하거나, 뭐 그런 것들이 명시적인 이유가 되는 것 같기는 하나 딱히 그게 전부인 것 같지도 않고 딱히 설명할 필요도 못 느낀다. 그래도 보통의 경우 꽤나 비슷한 류의 음악을 좋아하게 되는 것 같고 그 부류에 맞지 않는 노래는 그렇게 찾아듣게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다가도 나의 음악 경향성이 확 바뀔 때가 있다. 바로 사랑할 때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음악은 좋다. 아까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사랑은 분명한 방향을 가진 강한 마음의 흐름이고 그 거역하기 힘든 흐름을 타고 사랑하는 사람의 음악을 계속 듣게 된다. 그렇게 듣다보면 어느새 너의 취향이 아니라 나의 취향이 된다. 그렇게 내가 가진 세계가 바뀌는 모습을 확인할 때 사랑하는 사람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