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래된 친구

(빛과 소금 - 오래된 친구)

정밀 검사 결과를 받았다. 대충 이야기 하자면  걍 어 너 주의산만에 과잉행동이 보이네. 말하는데 왜 그렇게 다리를 떨어? 뭔 말을 이거하다가 저거하다가 그래? 이런 수준에서 증상과 주의력 검사만으로 ADHD를 판정하기도 하지만 병원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정밀 검사를 하고 여러 부주의 증상이 다른 정병(우울증, 양극성 장애 등등) 때문은 아닌 지 정확하게 검사하게 하고 난 이후에나 ADHD 진단을 내리기도 한다. 막 컴퓨터 모니터에 무슨 신호가 계속 나오면 스페이스 바를 빠르게 누르며 반응하는 진단은 모든 ADHD 검사의 공통 사항이고 정밀 검사의 경우 웩슬러 지능 검사, 로샤?라고 불리우는 그 잉크 대칭 나비 같은거 보고 뭐가 보이냐, 나무 집 사람 그리기, 암산, 숫자 외우기, 단어 외우기, 뭐 그림 따라 그리기, 문장 완성하기, 900개 정도의 1-5 scale 질문 답하기 등등을 수행한다. 검사비가 무려 33만원인가 그렇다.

저런 정밀 검사를 바탕으로 나온 결과는 ADHD + 우울증이다. 검사 결과는 7페이지 가량의 나에 대한 보고인데 이런 저런 검사 결과와 임상 심리사의 상담 후 소견을 바탕으로 나를 진단 내린다. 예를 들면 이렇다. 지능 검사의 경우 언어, 지각 추론 능력에서 높은 성적이 보이나 작업기억, 처리속도 영역에서는 평균 보다 훨씬 낮은 성적이 보인다. 점수가 높은 영역은 핵심적인 지적 능력을 볼 수 있는 수치들인데 해당 수치들이 높게 나오나 기억 및 처리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낮고 그 차이가 26점 차이로 드문 수준의 차이를 보인다. 이는 주의력 결핍으로 증상이기도 하며, 능력 대비 낮은 아웃풋을 내고 있는 근거이다. 능력 대비 낮은 아웃풋을 내니 자존감 떨어지고 뭐 이러쿵 저러쿵 해서 우울이 온다. 뭐 그런 식이다. 그거 말고도 여러 말들이 많은데 다 쓰기는 부끄러우니 그냥 적당히 아픈 놈이구나 하자. 

그래서 아 잘됐다 콘서타 받겠구나 싶었는데 의사쌤이 니가 우울이면 콘서타를 주겠는데 내가 보기에는 조울로 보인다. 조울에 콘서타 먹으면 우울 빡세게 와서 다 조진다. 그러니 조울약 먹자고 하셨다. 나는 아씨 걍 콘서타 주지 무슨,,, 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내 마음이 뻔히 보이셨던 선생님은 콘서타 받고 싶죠?라고 묻는다. 네라고 말헀지만 조지기 싫으면 걍 닥치고 조울약 먹자고 하셔서 아 네 ㅠ 하고 조울약을 받았다. 목표의 반은 달성했고 나머지 반은 언젠가 달성하겠지.

이때까지 정병 다니면서 뭔가 소감을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뭐 별 생각이 없어진다. 생각보다 흥미있는게 없고 뭐 하나 판단하는데 너무 오래 걸린다. 걍 MRI 같은거는 시간이 걸려도 그 날 찍으면 결과가 그 날 바로 결과가 나와서 답답하지 않은데 이건 뭐 말하고 검사하고 하면서 처음 병원을 가고 1달 가량이 지나서야 뭐 처방이 나온다. 그러니 점점 관심이 떨어져서 별로 생각할게 없고 귀찮기만 하다.

정병 자체는 좀 재미있는게 많다. 근 두달 게임 perk 달성하듯이 정병 업적들 차곡차곡 달성하는 과정에서 겪은 감정과 고통들이 돌이켜보면 신기하다. 처음 병원에서 준 우울 약은 굳이 따지면 기분 좋아지게 하는 약 같던데 먹으면 갑자기 현실 감각이 떨어진다. 모든게 너무 붕 뜨고 모든게 다 제 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는다. 그냥 울렁이며 흔들거리고 내가 현실에 1/10쯤 소환된 기분이었다. 그 꼬라지니 모든 것에 집중이 안 되고 잠도 똑바로 자지 못 한다. 하루에 한시간 반 정도 잘 수 있으면 감사하다. 낮에도 30분씩 졸기는 하는데 그런다고 피로가 풀리는 건 아니니 피로에 늪에 빠져 고통은 심해져만 갔다.

새 약을 받았다. 새 약은 먹으니 한없이 피곤해지고 졸리다. 그리도 다운이 심하게온다. 힘들다. 일하는 도중 몸이 무거워 미칠 것 같았고 퇴근하자마자 침대에 눕는다. 그리고 잠시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침대를 벗어나지 못 한다. 이것저것 할 일이 많지만 도무지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미칠 것 같다.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친구들이 정말로 많이 도와줬다. 누군가는 안아주고 다정한 이야기를 해주고, 누군가는 혼내기도 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기의 이야기를 해주기도 하고, 찾아와주기도 하고 등등등,,, 그 덕에 살았다. 여러 이야기가 많았는데 예를 들면 친구 중 하나는 우울이 심해서 더 이상 음악을 못 듣는다고 한다. 내가 계속 음악 들으라고, 에어 하우스나 가자고 이야기 하니까 화낸다. 왜 계속 음악 이야기 하냐고! 음악 더는 듣기 싫다고 한다. 그때서야 내가 친구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음악이 싫다는데 나는 음악이 싫다는 사실 자체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음악에 매우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항상 일상은 음악이었다. 일할 때도 음악을 틀고, 장보러 갈 때도, 차를 탈 때도, 담배를 필 때도, 집에서 쉴 때도 언제나 음악이다. 1분 정도의 틈이라도 생기면 강박적으로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다. 근데 막상 음악을 틀려고 하면 뭘 틀 지 잘 모르겠다. 그러니 그냥 이거저거 보이는 거 틀다가 마음에 안 들면 30초도 안 돼서 노래를 바꾼다. 그리고 또 마음에 안 들면 노래를 바꾸고는 한다. 혹은 그냥 뇌 터지도록 하드코어 노래를 듣는다. 사람들과 만나서도 음악 이야기만 한다. 모르는 사람에 음악 취향만이 관심이 간다. 그 사람이 하는 다른 자신의 이야기들은 그렇게 관심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집착적으로 음악 이야기를 하며 상대와의 교류를 피한다.

여러 생각을 하고 그냥 음악을 꺼보았다. 음악을 끄자마자 음악을 다시 틀고 싶어진다. 참는다. 그리고 또 참는다. 그리고 들리는 주변의 소리를 집중한다. 여러 소리가 들린다. 개같은 이케아 IoT 스마트등의 고주파음, 앰프의 미약한 고주파, 한결 같이 시끄러운 윗집의 대화 소음, 바깥의 차와 사람 소리, 바람 소리, 냉장고 소리가 들린다. 듣기가 싫지만 그냥 듣는다. 그러다가 안 듣는다. 그리고 다시 들린다. 그러다보니 갑자기 숲에 가고 싶어진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듣고 싶고 숲의 풀과 흙과 나무 냄새가 맡고 싶다. 나뭇가지들이 그리는 하늘을 보고 싶다. 햇살이 만드는 다양한 잎의 색깔도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니 녹차를 마시고 싶어졌다. 그 생각이 드니까 4시간 동안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하면서도 일어나지 못한 침대를 바로 벗어나게 되었다. 근데 녹차를 마시려니 산책이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산책을 나갔다.

산책을 나가면서도 평소와는 다른게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끼지 않는다. 귀 아픈 차소리, 거슬리는 사람들 대화 소리, 내 발자국 소리, 바람이 귀를 스치는 소리, 뭐 이런 저런 일상의 소리들을 정말 오랜만에 듣게 된다. 그렇게 듣다보니 갑자기 머릿 속에서 추상적이 시계가 떠오르고 그 시계가 또각또각 작동하는 느낌이 든다. 이제서야 나의 시간이 움직이는구나.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너무 자연스럽게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내가 음악을 들으면서 시간을 멈춰왔다는 것을 깨닫게된다. 현실이 너무 싫어서 음악의 방으로 도망쳤다. 그 곳에서는 음악의 시간에 나를 내맡길 수 있다. 이런 생각이 들다보니 현실의 소리 하나하나(혹은 낮은 배스 사운드나 높은 피치 사운드)가 시간을 진동시키는 것 같았다. 일상의 소리를 듣는게 즐겁게 느껴진다. 왜 많은 전위 음악가들이 종국에는 필드레코딩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다들 정병 고인물들이라서 그럴 것이다.

근데 생각해보면 ADHD+양극은 나의 오래된 친구이다. 정밀 진단 결과가 나오는 날 친구들에게 내 진단명을 맞추는데 판돈을 걸으라고 했고 완전 정배가 ADHD+우울과 ADHD+양극이었다. (참고로 완전 역배가 정상, 기타 배팅은 경증 알콜 중독 같은게 있었다) (판돈 중에는  ‘치유로 가는 첫 걸음’도 있었다). 정배가 맞았고 대부분이 도박에서 승리했다. 말이 도박이었지 실제로 판돈을 받지는 않았는데 받았다고 해도 이긴 친구들이 받을 돈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내 진단명을 말해주니 모두 아 뭐 그렇냐? 뭐 달라진게 있냐는 식이다. 모두가 그냥 아 그렇지, 혹은 그게 조울이구나 하는 식이다. 혹은 뭐 도도가 도도하던거 뭐 어쩔? 티피컬 도도잖아? 도도스럽다 식의 이야기만 듣는다. 오래된 친구인데 나만 모른 척 한 것이니 달라진 건 없다. 그냥 그 친구를 하도 모른 척 무시하니까 친구가 화나서 날 좀 못 살게 구는 것이다. 어루고 달래고 또 대화하고 알아나가고 그 친구랑 함께 일도 하고 친구도 만나고 하면서 오래된 친구랑 이제서야 진지하게 대화를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