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이 왕이다 (쟈스민 예찬)

모두가 손님이 왕이라고 말한다. 사실 그런 착각은 민주주의의 주인은 주권자인 국민이다와 같이 잘못된 생각이다. 사실 주인이 왕이다. 

우리 동네에는 쟈스민이라는 매우 훌륭한 월남쌈 + 쌀국수 + 볶음밥 + 간단한 튀김을 코스로 파는 베트남 음식점이 있다. 항상 먹을 때마다 이건 베트남으로 수출해야해!하고 생각들 정도로 맛있다. 그 쟈스민에서 밥을 먹기 위해서는 당일 아침 9시에 전화를 걸어 당일 예약을 해야하는 어려운 통과의례가 있다. 이게 왜 그렇냐하면 워낙 인기가 많다보니 예전에 예약을 안 받던 시절에 사람들이 12시 식사인데 11시 전부터 줄을 서서 기다렸다. 사장님 혼자 운영하고 홀이 작다보니 많은 사람을 수용하지 못 하는데 이 때문에 실컷 기다려놓고 못 먹는 경우도 많았다.(물론 사장님이 미리 알려주셔서 12시까지 기다리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사회적 비효율을 막기 위해 당일 9시 전화 예약 시스템으로 바뀐건데 이것도 쉽지만은 않다. 추측하기로는 아침 9시전까지는 사장님이 수화기를 들어놔서 전화를 안 받으시다가 9시가 되면 전화를 받으신다. 근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인기가 워낙 많다보니 모두가 9시부터 불이나도록 통화를 시도하고 있고 사장님과 통화를 성공한 한 사람을 빼고는 모두 ‘고객님이 통화 중이니 다시 거쇼’라는 안내 문구만 듣고 있다. 그 모든 멘트를 들을 시간은 없다. 사장님의 전화는 언제 끊어질 지 모르고 모두가 전화를 시도하고 있으니 빠르게 전화를 끊고 계속 통화 시도를 해야한다. 운이 좋으면 20번 정도 시도에, 운이 나쁘면 50번 정도 시도에 예약을 성공한다. 운이 많이 나쁘면 예약을 못 하는거다. 그래서 보통 9시 9분? 정도 쯤까지 통화 시도가 실패하면 점심 예약은 불가능하고 저녁 예약을 해야한다. 그렇게 예약을 성공해서 점심 때 쟈스민을 먹으러 가면 나와 같이 아침에 예약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식사를 하고 있다. 모두가 적어도 전날부터 주변 사람들과 들뜬 마음으로 쟈스민을 먹을 궁리를 했고, 아침에 정신 없는 와중에 9시에 전화해서 쟈스민 예약을 했던 사람들이다.

쟈스민는 단일 메뉴 음식점이다. 인수의 맞는 세트를 시키면 월남쌈, 쌀국수, 볶음밥, 튀김의 순서로 식사가 나오고 예약제로 운영되다보니 모든 음식은 정해진 타이밍이 재깍재깍 준비되어 나온다. 월남쌈은 불고기, 오리고기, 닭고기 3개가지의 고기와 새싹, 양배추, 면, 단무지, 비트, 빨간 파란 피망(파프리카?), 계란지단, 무 등등 여러 재료들을 정말 정갈하게 썰어서 알록달록 예쁘게 내어주신다. 그와 더불어 5가지 소스가 준비되어있다. 이제 라이스 페이퍼를 뜨거운 물에 담궈 불린 후에 여러 재료를 넣어 월남쌈을 싸먹으면 되는데 이때 그냥 재료를 되는대로 이것저것 넣어서 쌈을 싸면 주인 아저씨한테서 한소리 듣는다. 먼저 쌈을 싸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주시는데 여러 재료를 그냥 얹는게 아니라 모양이 잡히도록 정갈히 놓는 법과, 재료를 어떤 순서로 넣어야 쌈의 모양이 예쁜지, 쌈은 어떻게 싸는지를 우선 가르쳐주신다. 그러고나서는 다양한 소스를 하나씩 찍어먹어보고 또 다양한 소스를 동시에 찍어서 먹는 즐거움을 이야기해주신다. 이에 더 나아가서는 쌈 재료를 얹을 때 최대한 예쁘게 얹는 것을 추천(요구)하신다. 내가 원래 이런 말들은 잘 듣는지라 이야기해주신 대로 재료를 하나하나 정성껏 예쁘게 올려본다. 재료의 위치를 정확하게 잡아 쌈을 쌀 때 흐트러지지 않는 것에서 더 나아가 다양한 재료를 마치 파인 다이닝의 플레이팅을 하듯이 정성껏 모양 만들면 얹어보기도 한다. 또 다양한 재료의 다양한 형태와 색을 고려하여 이런 저런 색 조합을 시도해보며 쌈을 만들다가 정말 예쁠 때는 싸지도 않은 쌈을 사진 찍기도 한다. 그렇게 쌈을 만들면서 먹어보면 쌈의 맛이 다르다. 쌈이라는게 기껏해야 입 안에 들어가 우드득 우드득하다보면 다 섞이는 것이니 굳이 예쁜 쌈이 맛있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정성껏 모든 재료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면서 쌈을 싸면 먹을 때에도 각 재료의 향을 조금 더 신경을 쓰면서 즐기게 되는데 이때 각 재료들에서 터져나오는 그 다양한 향들은 미각적으로도 즐겁지만 시각적으로도 각 재료가 상상이 되면서 그 향이 더 즐겁게 느껴진다. 어떤 티비에 나오는 돈까스 좋아하는 사람이 음식을 먹으면서 이게 힙합이지라고 하는데 그 사람이 뭐 먹은지는 모르겠지만 쟈스민의 월남쌈은 진짜 힙합이다.  그렇게 월남쌈을 먹다보면 나한테 주인 아저씨께서 잔소리(?)를 해주셨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게된다. 그 잔소리가 사실 음식을 더 맛있게 해준다. 

월남쌈 이후 나오는 쌀국수, 볶음밥, 튀김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쌀국수야 내가 4년 전 쯤 처음 가 봤을 때부터 맛있었지만 예전 볶음밥과 튀김은 사실 입맛에 맞지는 않았었다. 사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함께간 주변 많은 사람들도 같은 의견이었고 주변 테이블에서도 보면 볶음밥과 튀김은 많이들 남기곤 했다. 하지만 매번 갈 때마다 튀김의 구성이 바뀌기 시작했고 볶음밥의 맛도 갈 때마다 점점 맛이 달라져갔다. 그렇게 하루하루 바뀌다보니 지금은 월남쌈을 포함한 모든 음식이 매우 맛있어 밥 알 하나 안 남기고 다 먹는 지경에 이르게됐다.

쟈스민은 비싸지도 않다. 두명이 세트가 23,000원인데 나오는 구성이나 그 맛을 생각해보면 혜자 선생님도 탄복하고 갈 지경이다. 

항상 쟈스민을 갈 때마다 큰 감사함을 느낀다. 주인 아저씨께서 본인의 자부심일 것이 분명한 음식을 저렴한 가격에 내어주시는 것도 감사하지만 귀찮게 잔소리를 해가면서까지 자신이 만든 멋진 맛의 세계를 경험시키려고 노력해주시는 것에 감사하다. 내가 돈을 내고 음식과 서비스를 제공받는 입장이지만 돈을 내고 멋진 맛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나는  주인 아저씨가 오랜 세월 정성들여 만드신 맛의 세계에 신세를 끼치는 말 그대로의 손님이다. 주인아저씨는 정성을 다해 손님에게 많은 것을 해주시려고 노력하고, 나도 손님으로서 예의를 갖춰 내어주시는 음식을 즐기고 감사함을 표현한다. 쟈스민에서는 손님이 왕이 아니라 주인 아저씨가 왕이다. 

음식점 중에 종종 예약이 어렵거나 가게에 들어갔을 때 주인장이 곤조를 부리거나 해서 먹기 어려운 식당이 있다(쟈스민 아저씨는 곤조와는 거리가 멀다. 다정하게 말해주신다). 나는 그런 음식점에 가는 것이 좋다. 당연 불편을 감수할 만큼 맛있기에 좋기도 하지만 주인장의 보여주려는 맛의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 단순히 돈이 아닌 나름의 나의 정성을 다해 통과의례를 거치는 것이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