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날 친구랑 부평에 바에 가서 놀았다. 그때 했던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옮겨 본다.
촘스키가 말한 것처럼 대중은 복잡한 정치 및 경제적 이슈에 대해 놀라운 수준의 직관을 가지고 있다. 무슨 말이냐면 꼬일대로 꼬인 중동의 이슈 같은 것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하면 사람들이 예상외로 본질을 꿰뚫고 있는걸 발견하게 된다. BTS 슈가가 탄 이동수단이 음주 형사처벌 대상인지 아닌지는 사법적 의미에서야 중요한 일이지 대중의 멍석말이 입장에서는 그리 중요한 쟁점이 아니다. 하지만 미디어에서는 퍼스널 모빌리티인 것인지, 스쿠터인 것인지에 대해 중요한 쟁점인 양 떠들어대고 있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의 대화 주제도 PM vs 스쿠터로 이어진다. 여기서 무서운 건 모두가 본질을 볼 줄 알기에 자신들이 하는 헛소리가 헛소리인 것을 알고있다. 그러니 그런 소리를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우중충해진다. (내가 멍석말이 하자면 음주 전동 스쿠터는 매우 위험하다. 맨 정신에 전동 스쿠터를 타도 정말 위험하다고 느끼는데 술 취해서 탄다고,,,? 이실직고 하자면 10여년 전에 술 취해서 자전거를 타다 혼자 넘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음주의 위험성을 가슴 깊이 새겼다)
윗 문단의 첫 문장에서 밝혔듯 대중들은 대개의 경우 사건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직관을 가지고 있다. 친구랑 나랑 바테이블에 앉아 남들이 없는 대단한 식견을 갖춘 양 떠들지만 사실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이야기이다. 사실 본질에 대해 떠드는 건 사회계약에 어긋나는 행위였고 우리가 우리가 그 계약을 위반하고 있던거다. 이 말을 하자 친구가 대답한다. ‘우리는 첫번째 인생이라서 멍청한거라고, 남들은 이미 9번 윤회해서 똑똑한 거라고. 그러니까 우리처럼 헛소리를 하지 않는거야’. 매혹적인 상상이 가득한 이야기에 단숨에 반했지만 약간의 반발심이 느껴진다. 항상 ‘똑똑함’, ‘명석함’을 지향하고 본질에 대해 떠드는 것이 참한 일이라고 믿어왔기에 본질에 대해 떠드는 우리가 바보라는 친구의 이야기에 완전히 동감할 수는 없었다. 친구랑 헤어지고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니 친구가 했던 말이 계속 생각난다. 본질에 대해 떠드는 우리가 멍청한걸까? 어렴풋이 머리 속에 있는 죄책감들이 다시 뇌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기 시작했고 친구의 이야기가 옳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재미있게도 10여년 전에 같은 친구가 해줬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정확한 디테일은 기억 안 나는데 탈레스의 우물 같은 이야기다. 탈레스의 우물 이야기는 쓰기 귀찮아서 한겨레 기사 글을 북붙한다.
탈레스는 어느 날 별을 쳐다보며 걷다가 우물에 빠지고 말았다. 트라키아 출신 늙은 하녀가 그 꼴을 보고 놀렸다. ‘하늘에 있는 것들을 열심히 보더니 정작 자기 발 앞에 있는 것은 보지 못하는군.’ 탈레스는 고대 그리스 ‘일곱 현인’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 꼽히는데, 플라톤이 <테아이테토스>에서 전하는 이 이야기 속 탈레스는 지혜롭기는커녕 어리숙해 보인다. 철학 하는 사람 곧 ‘앎과 지혜에 몰두하는 사람’은 먼 곳에 정신이 팔려 눈앞의 것을 보지 못하기에 쉬 웃음거리가 된다. 플라톤은 말한다. “그런 사람은 경험이 없는 탓에 우물에 빠지고 온갖 난관에 맞닥뜨려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다가 바보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나 자신을 지식인, 지성인이라고 지칭하지는 않지만 삶의 태도는 그에 가까웠다고 느낀다. 항상 사변적인 것에 몰두하고 현실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항상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죄책감을 느꼈고 그 죄책감이 30여년 쌓이다보니 인생의 부채가 가득하다고 느껴왔다. 이 블로그는 내 삶을 태도를 가장 적절히 대변하지 않는가?
난 항상 똑똑하고 명철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세상이 똑똑한 사람으로 가득 찼으면 좋겠고 똑똑한 의견이 가득하기를 바래왔다. 나의 그런 태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 내가 누군가에 대한 소개를 할 때이다. ‘저 친구는 똑똑해!’. 절대 이 평가를 빼놓지 않는다. 혹은 누군가에 대해 물을 때 ‘그 사람 똑똑해?’. 절대 이 질문을 빼놓지 않는다. 근데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삶을 지향하지 않는다. 뜬구름 잡는 소리를 싫어할 수도 있고 그냥 가십을 이야기 하는게 즐거울 수도 있다. 그냥 돈 버는게 즐거울 수도 있다. 미디어 극단적인 몸 이미지를 동경하고 그 몸을 만들어서 사는게 즐거울 수도 있다. 그냥 삶이 다를 뿐이다. 각자가 하는 질문들이 다른 것이다. 아래의 유튜브 영상에 들어가서 댓글을 봐라. 아니면 뭐 저출산 같은 것에 대해 진지하게 다루는 유튜브 영상을 봐라. 본질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사람들은 매우 명석한 대답을 남긴다.
갑자기 왜 죄책감이니 각자의 삶이 다르다느니 이야기하냐면 본질에 대해 떠드는 건 ‘사변적인 것에 대해서 떠드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다. 남들이 그 질문에 대해 대답하지 ‘못’ 하는게 아니라 ‘안’ 하는거다. 그 사람들에게는 그런 질문은 중요하지 않을 뿐이다. 그때서야 나의 죄책감을 명확히 바라볼 수 있었다. 나에게만 중요한 것에 대해 붙들려 저 이상한 별나라에 의식을 던져놓고 정작 지구에서의 삶을 경멸하는 것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이 죄책감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죄책감은 연쇄적인 죄의 사고 고리로 이어진다. ‘이렇게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걸 좋아하는데 이렇게 해서는 남들처럼 현실적으로 돈도 벌고 결혼도 하기는 힘들어! 그러면 열심히 남들처럼 살아갈까? 근데 그건 재미없어! 재미없어도 해야하자나! 근데,,, 그렇게 사는건 싫어! 다른 길은? 모르겠어!’. 문제가 보이는가? 나는 안 보였다. 마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의 SEP 필드에 가려진 것 같다. (Somebody Else’s Problem Field. 뇌가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곁눈짓에만 보이는 장. SEP 필드에 가려진 물체는 보고자 하는 분명한 의지나 인식 없이는 볼 수 없다.)
최근에 들어서 사변적인 ‘헛소리’ 보다는 현실에 뛰어들려고 하다보니 새로운 방향으로 나 자신을 인식할 수 있게 됐다. 나는 내 질문에 대답하며 현실에서 가치를 찾아나가면 된다. 처음에는 어떻게 할 지 모르겠지만 문제를 바라보면 SEP 필드에 가려진 길이 보인다.
최근에 의류 브랜드를 운영하는 친구의 사이트 디자인 관련된 일을 맡게 되면서 친구와 브랜드, 디자인에 대한 많은 대화를 나눴다. 대화의 대다수는 나의 짜증과 분노로 채워졌다. 좁게는 세부 레이아웃, 색깔, 폰트, 폰트 웨이트, 여백에서부터 크게는 전반적인 디자인 철학, 무한 스크롤, 지나친 속도의 쇼츠 흐름들에 대한 짜증과 분노를 쏟아냈지만 이런 말을 할 때 은은하게 느껴지는 자기 혐오가 이제 느껴지지 않는다. 저주 같았던 나의 예민함과 사변주의자 같은 모습은 내가 하고자 하는 디자인에 담고 싶은 말들을 섬세하게 해주었으며 분명하게 해주었다. 이때서야 나의 사명을 느낀다. 나는 이 지긋지긋한 소비 유행 급류가 혐오스럽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해서 사람들에게 내 세계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다. 마음 불편한 채로 본질에서 벗어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나의 질문과 대답을 전해주고 싶다.
(뭐 그렇다고 디자이너로 살겠다는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