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은 하루의 반

어젯밤 오랜만에 만선호프를 들렸다. 작년 12월 31일에 친구랑 갔는게 아마 마지막 방문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치면 올해 처음 간 것이다. 5개월 만에 간 것이니 내 인생 85까지 산다고 가정하고 단순 나누기를 해보면 앞으로 144번 정도 더 간다는 계산이 나온다. 사실 이거 정확한 수치를 계산하기 전까지는 144번 보다는 적을 것 같아서 만선호프를 가는 한 순간 순간을 소중히 해야겠다는 다짐 문장을 쓰려고 했는데 계산해보니 많다. 그냥 별 생각없이 가도 될 것 같다.

뭐 말 나온 김에 작년 마지막 날의 기억은 잠시만 되살려보자. 그날 장씨랑 만선호프에서 만나 노가리랑 치킨을 까먹었다. 그렇게 술 좀 들이키고는 17년 12월 31일에 만료되는 영화 예매권을 쓰겠다는 명목으로 명동 CGV를 갔다.(저 예매권 출처는 밑에서 밝혀질 것이다. 우연하게도) 11시 40분 쯤인가 영화표를 샀는데 다행히 예매권은 쓸 수 있었다. 위대한 쇼맨이라는 영화를 봤었는데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1월 1일 새해 첫날에 영화가 끝나고 장씨랑 장씨 남친이랑 남산을 가려고 했으나 장씨가 뒷통수를 치셔서 그냥 혼자 이태원에 갔다. 언제나처럼 Roxy에 가서 음악을 들으며 아이패드로 공부나 했다. 그때 Haskell 공부했던 것 같은데 새해 첫날부터 사람이 많은 시끄러운 바에서 공부나 하고 앉았으니 나도 참 재미없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남자 외국인들이 말을 좀 걸기는 했는데 귀찮아서 공부나 더 했다. 그렇게 몇시간 술이나 마시면서 공부하다가 5시 반 쯤인가에 남산에 올라가기 시작했다. 일출을 보고 싶어서 올라가는데 평소 그 시간대의 남산과는 다르게 사람들이 꽤 있었다. 올라가기 전에는 남산에 일출을 보러가는건 서해에 일출을 보러가는 것이랑 비슷한게 아닐까 염려스러웠으나 같이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괜찮은가보다 싶었다. 다 오르고 보니 해 뜨려면 1시간은 더 있어야하는 것 같았고 팔각정 앞에는 방송사 차들과 무대행사장, 대형스피커에서 나오는 시끄러운 음악이 가득했다. 짜증이 확 났고 그냥 내려와버렸다. 그렇게 회현쪽으로 내려오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무언가 생각했던게 많아서 글을 쓰려고 했는데 귀찮아서 미뤘더니 다 까먹었다. 성실히 글을 쓰자.

어제도 장씨를 만났다. 이번에는 장씨 뿐만 아니라 장씨의 밥메이트이자 나의 몇 없는 친구 문씨도 함께 만났다. 언제나처럼 문씨는 빼다가 술을 마셨고 장씨는 소주를 외치며 혼자 엄청 들이킨다. 그러다 장씨가 죽어갈 때 쯤 장씨의 또다른 친구 함씨가 왔다. 함씨는 4년 전인가 학부시절에 한번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모습이랑 많이 달라졌더라. 예전에 수줍던 모습에서 MC 오’함’마가 된 모습을 보니 나도 저렇게 변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같이 술 먹고 놀다가 막차가 끊겼고 나와 문씨는 문씨의 부모님이 계신 문씨네 집으로 향했다. 어머니가 환영해주셨고 이를 닦고 자버렸다. 문씨네 방은 작지만 깔끔했다. 책이 많은 방은 언제나 좋다. 아침에 일어나 문씨로부터 뜬금없는 웰컴 기프트로 샤프와 펜을 받고 어머님으로부터 망고 주스를 받았다. 아침에 일어나신 아버님과 어머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어머니가 직접 갈으신 블루베리 우유를 마시며 집을 나왔다. 학교에 가려고 했으나 모종의 사정으로 가는 중간에 삼선교에 내렸고 연구실에 빵이나 사갈까 싶어서 나폴레옹 제과점에 들렀다. 아쉽게도 8시에 문을 열지 않았고 옆에 이문열씨가 자주 들렀다고 문씨가 주장하는 청국장 집에서 값싼 가격에 진수성찬을 먹고 학교로 향했다.

지금까지 별 일이 없는 듯 싶지만 기분이 매우 좋았다. 문씨네 집에 가기 전에는 불편할 것 같았으나 따뜻한 환대와 웰컴 기프트 덕에 기분이 매우 좋았다. 문씨 집을 나서고 나오는 동네의 모습 또한 신선했으며 선거철이라 걸려있는 교육감 포스터를 보며 되도 않는 정치 얘기를 문씨랑 같이 주절대는 것도 좋았다. 7시 반에 버스를 타니 고등학생들이 등교하는 모습도 반가웠으며 청국장 집의 훌륭한 반찬도 좋았다. 또 쓸데없이 알지도 못하는 이문열씨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았다.

즐거움은 계속된다. 청국장 집에서 경신고 옆을 거쳐 올림픽 기념관을 거쳐 학교 쪽문 엘리베이터 앞 커피집을 갔다. 이 길을 다녀본 사람은 알겠지만 정말로 평화롭고 기분 좋은 길이다. 커피집의 커피는 예상치도 못하게 향이 정말 좋았다. 학교에 가서 예전에 받지 않았던 학부 학위증을 받으러 행정실에 갔다. 행정실에 가니 또 내 지병이 도져버렸다. 예전부터 행정실만 가면 난동을 부리고 싶어진다. 무언가 그 답답한 공무원 분위기가 짜증이 난다. 학생을 위해 고용된 사람이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있으니 그렇게 호감이 가지는 않는다. 그래서인지 행정실만 가면 어김없이 난동을 부린다. 저번에 경제대 행정실에 왔을 때는 졸업이 문제였다. 학부 졸업을 하려면 봉사를 40시간 한 후에 증명서를 제출해야한다. 문제는 하루에 8시간 초과의 봉사는 인정이 안되는데 내가 하루 12시간 가까이 몰아서 봉사를 했고 이를 숨기기 위해 증명서 양식 중 전체 봉사 시간만 나올 뿐 일당 봉사시간이 안 나오는 증명 양식을 제출했다. 슬프게도 바로 딴지가 걸렸고 나는 버텼다. 에에… 이 폼은 안 된다고요? 저 봉사 했는데… 에에… 봉사만 하면 됐지… 에에 안되는거에요…? 다시 뽑아야해요?… 저 지금 수원에 있어서 다시 뽑기도 그런데… 그렇게 실랑이하다가 가차없이 잘라내길래 가방에서 똑바로된 증명 양식을 꺼냈다… 그렇다. 나는 안 뽑아왔다고 거짓말을 했던거고 난 일말의 부끄러움 없이 똑바로된 증명서를 제출했다. 행정실 직원은 황당해하는 기색 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일을 처리했다. 하루 12시간을 8시간으로 줄이며 ‘8시간 인정되네요 맞죠?’ 라고 물었고 나는 12시간 안되요? 라고 대답했다. 대답은 더 차가웠다. ‘8시간도 인정 못 받으시고 가실래요?’ 이런 일이 3번 반복되고 난 포기했다. 결국 30시간만 인정됐고 10시간 봉사를 더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비굴하게 어찌 안되냐는 나의 애원에 대한 답은 ‘헌혈하세요’다. 헌혈을 하고 헌혈 증서를 제출하면 10시간을 인정 받는다. 그렇다 CGV 예매권은 헌혈을 하고 받은 것이다.

위의 난동은 자랑스럽다고 쓴 건 아니다. 명백히 내가 잘못했다. 그냥 평소에는 안 그러는데 행정실에만 가면 저런다. 그렇다고 반성을 똑바로 하는 것도 아니다. 난 정말 나쁜 놈이다. 이번에는 난동까지는 아니다. 학위증을 받고 싶다고 이야기 했다. 근데 말하는 표현이 장난끼가 넘쳤다. ‘제가 오우으으으래 전에 졸업했는데 학위증을 안 받았습니다.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러니 직원은 당연히 ‘오우으으으래 전이요?’ 하니 ‘아.. 작년 가을에 졸업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잠시 자리를 비워 학위증을 찾아오신 후 나에게 신분 확인을 위해 신분증을 요청했다. 그런거 전혀 없는 비시민 도도 ‘에에… 그런거 없는데요?‘라며 배짱을 부렸다. 없으면 안된다고 하길래 모바일 학생증이라도 보여드리면 될까요? 라고 물었다. 된다고 하셔서 보여드리려 했더니 뭐가 잘 안 된다. 그래서 대학원 다닌다는 이야기를 드리니 대학원 학번을 물으신다. 그걸로 조회하시고 주민등록번호를 물어보시며 재확인 끝에 신원 확인을 마치셨다. 그냥 감사하다고 하면 될 것 가지고 ‘오 역시 대학원 다니니까 좋아. 신분증도 안 들고다녀도 되네’라고 문씨한테 이야기하며 실없이 웃었다. 직원은 ‘들고 다니셔야해요!’라고 핀잔을 줬지만 이미 상황은 끝났으니 뭐… 그렇게 학위증도 얼떨결에 받으니 졸업한 기분도 나고 좋다. 졸업하고 대학원을 다니지만 이렇게 여유로운 아침 산책을 다니며 금잔디를 거닐다니! 난 축복 받았다.

그렇게 수원으로 가는 셔틀버스를 타고 서울을 떠났다. 떠나는 버스 안에서 어제 중고서점에서 산 장정일의 수필을 읽는데 이 수필 또한 일품이었다. 보는 내내 실실 쪼개면서 봤고, 책을 보다가 창 밖의 풍경을 내다 보니 친숙하고 사랑스러운 공간들이 끝없는 강물과 같이 내 옆을 넘실대니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물론 음악도 듣고 있었다. 최근에 판타지아의 마법사 미키가 그려진 티셔츠를 유니클로에서 샀는데 친구가 내가 그 옷을 입은 사진을 보고 판타지아 이야기를 잠시 나눴다. 친구가 그 영화에서 Sorcerer’s Apprentice만 기억에 남길래 그냥 호기심에 검색해보니 괴테가 쓴 시를 바탕으로 만든 음악인 것을 발견하고 이야기해줬다. 오… 새롭고 흥미로운 사실. 얘기를 하다보니 멜론 playlist에 판타지아 ost를 추가했고 내려가는 버스에서 그걸 들었다.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이 흘러나왔고 옆에는 한강이 흐르고 있었다. Chinese Dance 부분을 듣고 있었는데 음악의 리듬과 창 밖에 흘러가는 속도가 서로 꼭 맞았다.

버스가 수원 학교에 도착할 때 쯤 노래는 KC & The Sunshine Band의 Get down tonight로 넘어갔다. 그리고 나는 엄청난 것을 발견해버렸다. 버스 뒷편에 앉아있었는데 내 앞 버스 창가의 커튼에서 리듬에 맞게 그림자가 다가왔다. 마치 리듬게임의 노트와 같이. 위에 유튜브 영상을 첨부하니 한번 저 노래와 같이 보길 바란다. 저작권이 무서워서 동영상에 음악을 넣지는 못하겠다. 정말로 디스코에 심취하다가 학교에 도착했고 아직 11시가 안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햇살이 잔디로 쏟아지고 디스코는 빵빵하다. 춤을 추며 잔디를 가로질러 도서관을 갔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 촘스키 책 몇권과 문씨 집에서 잠시 읽은 화폐전쟁, 벌거벗은 지식인이라는 책을 빌리고 나오니 11시가 되었다. 아직 하루의 반밖에 되지 않았는데 정말 행복하다. Funky한 오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