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공각기동대 리뷰 다음편)

인간이 가치 있는 존재라고 믿지는 않는다. 인간은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라고 믿는다. 여기에 사소한 말장난이 있다. 인간이 가치있다고 말하면 ‘그 가치가 뭔데?‘라는 질문이 올 것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근데 ‘그 가치가 뭔데?‘에 대한 질문은 그 천성 자체가 오가는 말이 많아지는게 하는 녀석이다. 마치 ‘넌 왜 XXX 대통령 후보를 안 찍었는데?‘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랑 마찬가지이다. 각자 머리 속에는 어렴풋하게 가치라는 단어와 결부되는 언어, 이미지, 감각들이 가득 차 있어서 타인이 말하는 가치가 그렇게 잘 머리에 들어설 자리가 없다. 아니 대화를 하다보면 생각이 바뀌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다. 정말 지당한 말씀이지만 그게 쉽게 됐으면 내가 지금보다는 외향적인 활동을 하고 살았을거다. 이에반해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라는 말에도 똑같이 ‘그 가치가 뭔데?‘라고 질문한다면 그에 대한 무적화법이 있다. ‘가치’는 그 어떤 것이든 될 수 있어!

그 전 공각기동대 글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계속 변화왔다. 우리의 신체, 도구, 가치관, 도덕, 미적 기준, 관념, 철학 등등 변하지 않은게 어디있는가? 이 변화에서 중요한 건 우리가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이 바뀌는 것이다. 그 베,,,뭐시기랑 들,,,뭐시기 철학자들이 맨날 떠들던 이야기를 내 식대로 옮겨봐야 설명이 되는 부분이다. 인간을 하나의 기계로 생각해보자. 이 기계의 기본 목표는 생존이다. 기계에게 주어진 감각 센서(감각기관)은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이며 주어진 엑츄에이터(운동기관)은 온 몸의 큰 근육과 작은 근육, 성대, 눈 근육 같은 것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은 어떤가. 선사시대를 이야기 하자면 -30도에서 40도를 오가는 기후, 적이자 식량이 될 수 있는 수많은 동물들, 다채로운 색을 발하는 가시광선, 낮과 밤 등등의 자연조건이 있다. 인간이라는 기계는 주어진 조건에서 생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또 번식을 해서 종을 보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사실 말을 쉽게 표현하기 위해 종의 보존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게 맞는 말이지는 잘 모르겠다) 일단 우리는 가장 최우선으로 해야할 일은 눈으로 들어오는 다채로운 가시광선을 최대한 생존에 효과적인 방식으로 그 형태를 파악하는 것이다. 잠시 카메라의 입장이 되어보자. 인간이 눈 앞의 피사체를 찍는다고 하지만 카메라 입장에서는 그런거 모른다. 그냥 수많은 가시광선들이 무작위로 배열된 데이터에 불과하다. 컴퓨터를 잘 모르더라도 컴퓨터가 글자를 인식하고 물체를 인식하고 그것을 해석해내는 일이 쉽지 않은건 알지 않는가?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 눈 앞에 펼쳐진 무작위한 빛들을 생존이라는 분석하고 분류해내야 할 줄 알아야한다. 해가 졌을 때의 색과 해과 떴을 때 땅위의 색이 반복해서 그려진, 아주 느린 속도로, 자신의 눈높이보다 낮은 위치에서 움직이는 호랑이를 위험 물체로 인식해야지 빠르게 사냥을 하건 도망을 치건 할 수 있다. 눈 앞에 떨어진 빨간 해 모양의 자신의 손만한 사과가 굶주림을 해소할 수 있는 식량인 것을 파악해야한다. 그리고 청각, 미각, 후각도 중요하다. 그 호랑이의 소리, 썩은 사과의 향과 맛 같은 것들은 우리가 생존하는데 중요한 감각이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기존의 경험들을 생존이라는 목표 하에 분류한다. 그리고 운동한다. 다리의 근육을 써서 몸을 낮추고 몸통의 근육을 써서 몸을 균형을 유지하면서 팔 근육을 사용해 손을 뻗고 손근육을 사용하여 사과를 집어서 입에다가 가져다댄다. 우리 몸의 운동의 기억을 바탕으로 생존을 위해 수행하는 상호작용이다. 인식-운동의 고리가 생기는 것이며 우리는 사과를 봤을 때 몸을 움직여 그것을 줍고 섭취하는 자동 기계가 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이 추워진다. 추운게 고통스러운게 문제지만 더 큰 문제가 있다. 추울 때는 먹을 것이 없다. 인간은 겨울을 몇번 겪으면서 추운 겨울을 기억에 담고 그것을 버틸 필요를 느낀다. 이제 우리는 식량을 아무렇게 보이는대로 먹을 수 없다. 날이 점점 추워질 수록 식량을 적게 먹고 남은 것을 보존하게 된다.(선사시대에 식량 보존을 했는지 확인해보지는 않음) 갑자기 우리의 사과 자동 섭취 기계가 변해버린 것이다. 촉각과 시각을 통해 느끼는 계절의 감각이 사과 자동 섭취 기계의 입력값에 추가됐다. 그리고 우리의 출력값도 단순한 섭취에서 섭취와 보존으로 변하게된다.

그러다가 거대한 전환이 온다. 우기우기가 더이상 움직이지 않아 방치해버린 위치에 남았있던 생존활동과 전혀 관계없기에 방치된 단단하고 긴 뼈로 나의 식량과 번식 기계를 탐하던 녀석을 내리친다. 그랬더니 그 녀석이 우기우기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 기쁨에 그 뼈를 하늘에 던지고 긴 우주선이 된다. (당연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 이야기이다. 이 영화도 안 봤으면 좀 보자. 존나 재미없어도 좀 보자. 이 놈의 시발 세상은 뭔 필수 교양 이야기하면 꼰대, 힙스터, 예술충 취급하는데 아니 시발 스페이스 오디세이 정도는 보자 제발 시발) 그 거대한 전환 후의 자동 기계는 어찌됐는가? 번식 기계로 여겨지던 여성은 동등한 경제 활동 기계가 되었고 사랑을 나누는 존재가 됐다. 사과는 땅에서 줍는게 아니라 돈으로 사는 것이다. 무기였던 뼈는 어느새 치안 위협으로 인식되고 과학 수사의 주요 증거물이 되었다. 단순한 위험도를 분석하던 시각은 이제 수없이 많은 상품을 인지하고 선택되는데 활용된다. 단순했던 인식-운동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변해버렸다. 기존부터 그 연결고리에 있던 것들의 의미가 바뀌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했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것들이 그 연결고리에 들어온다. 그렇게 연결고리가 바뀔 때마다 우리의 인식-운동은 변했다.

가치는 변한다. 우리의 인식-운동 기계는 끊임없이 새로운 요소를 그 기계 안에 집어넣고 기계의 내부를 재배치한다. 그러다가 생겨난 결과물을 다시 그 기계 안에 넣어 어느새 기계 안의 요소 중에 자연물보다 비자연물이 더 많은 지경이다. 그 과정에서 각 요소들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변하면서 가치는 변한다. 다시말해 가치 창조는 변화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일이다. 이때 가치는 생존과 안정을 위해 변해가지만 그 과정을 멀리서 바라보면 무목적의 카오스 같다.

인간과 동물은 무엇이 다를까? 뭐 이런저런 대답이 있지만 나는 한결같이 답한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종의 한 개체가 자신에게 태어날 때 부여된 조건을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다. 그에 반해 동물은 태어날 때 주어진 조건을 종속되어 삶을 살아간다. 수학의 닫힌 연산이라는 개념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수학에서 닫힌 연산이란 특정 집합에 속한 요소들에 대해 연산을 수행했을 때, 그 결과도 같은 집합에 속한다는 뜻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실수에 더하기 연산을 할 때 그 결과 값은 실수이다(실수+실수->실수). 실수에 대한 곱하기 연산을 할 때 그 결과 값은 실수이다(실수X실수). 이때 더하기와 곱하기는 실수에 대한 닫힌 연산이다. 반면 1/0이나, -1의 제곱근 같은 것을 생각해봤을 때 나누기와 제곱근 연산의 경우 실수에 대한 닫힌 연산이 아니다. 대충 이해가 갔을테니 이걸 동물과 인간의 삶에 대입해보자. 동물은 태어난 순간부터 자연과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한다. 매순간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앞서의 연산에 빗대어 생각해보면 동물은 매순간 연산을 수행하지만 동물이 수행하는 모든 연산은 닫혀있어 그 결과 값은 여전히 자연계(자연 집합)을 벗어나지 않는다. 동물은 자연집합에 속해서 그 집합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다 인간은? 말이 필요한가. 어둠이 두려워기에 빛이 있으라! 외치면 빛을 창조하여 밤을 밝히고, 하늘이 무한히 높으니 그 너머를 넘보지말라고 하면, 태양계 너머로 보이저 위성을 쏜다. 자연상태는 투쟁이라고 말하면 사회를 만들어 안정을 창조한다. 생명은 번식을 최우선 목표로 한다는데 지금 한국의 출산율을 보면 그 말이 인간에게 적용되는가 싶다. 인간은 이상하다.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났지만 매순간 상호작용의 결과가 자연계를 벗어나고는 한다. 단지 자연만이 아니다. 인간은 열린 연산을 통해 자연계를 벗어나 인간계를 만들었는데 아까의 인식-기계의 이야기처럼 인간계는 인간계 조차도 변화시킨다.

인간에게 있어서 변화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를 거부할 수는 없다. 거부와 불능의 차이를 아는가? 거부는 수용과 거부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내리는 결정이지만 불능은 수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변화에 대해서는 불능만이 있을 뿐이다. 변화가 워낙 다양한 문맥에서 읽히다보니 이 말이 잘 안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걱정되긴하다만.

인간은 언제나 변해왔고 언제나 변할 것이다. 변화가 두려운가? 걱정하지말자. 우린 태어난 순간부터 언제나 변해왔고 매일매일 변하고 있다. 어떤 방향으로 변하는가? 그런건 알 수 없다. 내가 쉽게 말할 수 있는건 인간의 삶 자체에 변화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 뿐이다. 만약 그대가 산 너머 어둠 깊은 곳을 응시할 수 있다면, 상상할 용기가 있다면, 그 카오스에 뛰어들 용기가 있다면 변화를 꿈꾸자.

추가

ChatGPT한테 질문을 해봤다.

You
중간에 '베,,,', '들,,,'이라고 생략된 철학자 이름이 누구일까?

ChatGPT
'베,,,', '들,,,'으로 표시된 부분은 특정 철학자의 이름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생략된 표현을 바탕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철학자들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1. '베,,,': 이 부분은 '베르그손(Henri Bergson)'이나 '베버(Max Weber)'를 암시할 수 있습니다. 베르그손은 시간과 변화에 대한 그의 철학으로 유명하며, 베버는 사회학과 경제학 분야에서 중요한 이론을 제시한 학자입니다.

2. '들,,,': 이는 '들뢰즈(Gilles Deleuze)'를 지칭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들뢰즈는 변화와 차이에 대한 그의 복잡한 철학적 개념으로 유명합니다.

이 추측은 글의 맥락과 철학적 주제에 기반하여 합니다. 글이 변화, 상호작용, 인간의 가치 창조 능력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을 고려할 때, 이러한 주제와 관련된 철학자들이 언급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철학자의 이름을 알기 위해서는 더 많은 맥락이나 글의 전체적인 내용이 필요합니다.

베,,,들,,,이 누군지 뻔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쉽게 알아챌 지는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