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다보니 집에 내려간다고 동탄역에 갔다. 친구가 기차표를 대신 예매해줘서 SRT를 타기 위해서 왔는데 덕분에 참 당황스러운 일을 겪었다. 역에는 출발 30분 전에 와있었고 슬슬 차가 올 때 쯤 플랫폼에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화재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울리는 순간 양치기 소년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지만 차분히 출구를 향해 나가고 있었다. 사실 뛰는게 정상이긴 했다. 동탄 SRT역이 대략 지하 8층 정도는 될 것 같은 깊이에 위치해 있었기에 정말 화재가 났으면 뛰어도 죽을 각이었으나 정말 불이 안 난 것 같기에 그냥 별로 동요하지 않는 척 했다. 당연 열차 시간은 놓칠 것이 분명했으나 그 시점에서 열차 시간이 왜 중요하겠는가. 화재 경보가 울리고 있고 방송으로 원인 파악 중이라고 했으니 열차는 플랫폼에 들어오지도 않고 밖에서 대기할텐데 열차를 놓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비상식을 상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상황은 5분 좀 너머서 끝났고 그땐 이미 열차 출발 시간이 3분 가량 지난 시점이었다. 그렇게 차분히 다시 플랫폼으로 향하니 이미 열차는 떠났다… 황당하다. 그래서 매표소를 찾아가서 설명하니 ‘열차를 놓치셨다고요?’ 라고 해주시더라. 정정해드렸다. ‘열차를 놓친게 아니라 엿 먹었는데요?’. 그렇게 다음 열차 표를 잡아주었고 1시간 40분 가량 처량하게 커피를 마시며 열차를 기다렸다. 참 놀라웠던 건 그때 기차를 놓친 사람은 나 뿐이었다. 심지어 화재 경보가 울리고 대피를 하는 사람도 나 뿐이었다. 뭐 다른 사람들이 뭘 하든 무슨 상관은 아니다. 뒤지든 말든. 문제는 열차가 그 상황에서 별 일 없다는 듯이 들어오고 그냥 가버렸다는 것이다. 따로 내가 무슨 말을 하리요… 그냥 사람 다 죽이는 시스템이다. 사람들이 안전 불감증이라고 말하며 열 올릴 생각은 없다. 어떤 사람은 불감이고 어떤 사람은 민감하겠지. 문제는 적어도 시스템은 민감해야한다.
사실 내가 비상식적인 생각을 했는데에는 최근 일본 여행의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나라는 정말로 시스템에 미친 나라 같았다. 모든 것을 철저하게 기록하여 문서화하고, 시스템 속에 편입 시키는 나라인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길을 걷다가 마주치는 근방 지도를 보면 항상 대피소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으며 심지어 한글로도 표시되어있다. 아… 강렬한 시스템의 향기…
그 나라의 모든 것은 기록되고 관리된다. 상당 수의 건물 내의 벽의 타일에는 고유 식별번호가 있다. 한국에서 한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다. 문방구 코너에 가면 회계나 관리 서류 폼이 백여종이 존재한다. 서로 다른 용도의 것들이다. 길을 걸으면서 고장난 시설물을 본 기억이 없다. 아마 하루 내로 이상을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을 것이다. 당연 모든 건물들은 외벽이 매우 깨끗하며 내부도 훌륭하게 관리되어있다.
조금 더 나아가보려고 한다. 이 나라의 건물 98퍼센트는 네모로 가득 차 있다. 직육면체가 토지를 쉽게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이니 그런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이 나라는 그 이상이다. 단순 건물의 형체 뿐만 아니라 건물 외벽에 드러나는 수많은 패턴은 네모의 연속이다. 당연 대부분의 창문은 네모이며 그 모양이 균등하다. 네모 가로 세로의 비도 몇 종류의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 뿐이 아니다. 외벽에는 타일이나 벽돌이 차곡차곡 교차하지 않고 올라가며 그 네모 패턴을 명확하게 나타낸다. 절대로 그냥 공구리칠 하지 않으며 무언가 벽화 같은 것을 그리지 않는다. 복도가 외부로 드러나는 건물들은 절대로 길죽한 직사각형의 빛을 내뿜지 않는다. 복도 중간중간에 기둥인지 뭔지를 세우고 각 기둥 사이에 조명을 하나씩 놓아서 사각형을 빛을 내뿜도록한다. 실내에서 밖으로 내비치는 빛은 항상 흰색 혹은 따스한 노란색이다. 그리고 실내 벽은 항상 흰색이다. 흰색 벽에 따스한 노란 빛을 비추어 그 그라데이션을 항상 보여준다. 실내 내부도 항상 직선만이 존재하며 그 가로 세로 비는 항상 일정하다.
이런 건물들의 내외부의 모습은 단조롭다고 할 수도 있고, 편안하고 안정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디자인을 전혀 배우지 않은 사람으로서 쉽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안정감은 균일한 가로 세로의 비에서 나오는 느낌이다. 이 나라의 건축 디자인은 강한 시스템에 종속된 느낌을 준다. 디자이너는 훈련받는 동안 이 시스템을 완전히 숙달하고 이를 실현해내는 것 같다.
길을 걸으면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역할에 맡는 복장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직장인은 양복, 인부는 회색빛의 유니폼 등 모두가 완벽하게 유니폼을 드러내며 유니폼은 항상 그 소속이나 직업의 특성의 분명히 드러나는 장식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항상 시스템에서 그들이 해야할 일은 분명하게 수행한다. 백화점 종업원은 직원실에 들어갈 때 사람이 있든 없는 한번 매장을 향해 깊게 고개 숙인다. 인부는 아침 체조를 길에서 열심히 성실하게 또 요란하게 수행한다. 상점의 영업이 끝나면 알바와 매니저 및 직원은 모두 모여 그날의 일과에 대해 이야기한다.
평일 길에서 보이는 직장인들의 대화 및 상호 관계에서도 각자의 역할의 맞는 행동을 한다. 깊게 숙여 인사하며 인사하기, 한결 같은 제스쳐와 단어와 어조를 통해 자신의 역할에 이미 부여된 행동들을 분명히 수행한다. 길에서 호객을 하는 호스티스들은 항상 자신이 취해야할 행동을 성실히 수행한다. 일을 할 때 일본인들의 표정과 목소리는 한결같이 밝다.
모든 것이 표준화되어 있으며, 이 표준이 대부분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 같다. 내가 목격한 모든 것들은 세심하고 철저하게 만들어졌었다. 완벽하고 무결한 시스템을 만들어 효율적이면서도 안정적인 세상을 만드는 것 같았다. 그들은 하나의 온전한 세계를 만드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정원은 인간의 의도로 세심하게 만들어진 하나의 세계였다. 사실 은각사 같은 곳을 정원이라고 부르는 지 뭐라고 부르는 지는 모르겠으나 그 곳의 나무는 인간의 손길로 세심하게 다듬어졌으며 물의 흐름이나 건물의 모양, 바닥의 문양 모든 것들이 인간이 다듬었으며 그 요소들은 조화를 이루었다. 정원에 걸으며 여기저기를 바라보면 외부와는 단절된 인위적 공간에 들어온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일본 애니의 애들이 세카이 세카이라며 울부짖는 모습이 조금 더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이 사람들은 확실히 하나의 세상을 만드는 일에 인생을 거는 것 같다. 자신, 집단, 인간의 의지가 그대로 지켜지기를 바라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생기고 원하는 대로 움직이길 바라는 것 같다. 그 의지들이 모여 집, 마을, 도시, 국가가 되는 것 같다.
일본이 꽉 막힌 곳이라고 주장하는게 아니다. 그들은 정말로 변혁가들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끊임없이 체계를 만들고 체계를 한계를 발견하고 개량하고 또 부수고 새로 만든다. 정말로 아름답다.
일본 학원물의 주인공들이 그렇게 체육대회니 축제를 열심히 준비하며 학생다운 열찬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지 알 것 같다. 각자 시스템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다. 에반게리온에서 나오는 어른이 되어라라는 표현이 새롭게 느껴진다. 원래 의도를 내가 알지는 못하지만 맥락 상 보자면 아직 소년인 신지에게 세상을 받아들이고 나아가라 정도의 의미인 것 같다. 하지만 위의 이야기들을 고려해보면 이 나라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의 무게는 어마어마한 것 같다. 수많은 집단의 의지로 만들어진 견고한 그 시스템에 일원이 되는 것이다.
사실 견고한 시스템에 일원이라는 것이 재미있는 부분이다. 시스템 속 일원, 혹은 어른은 돈을 쓰고 그 돈에 상응하는 서비스나 재화를 제공 받을 수 있는 존재다. 그리고 그 돈을 벌기 위해, 그 돈을 주는 사람에게 그 돈에 상응하는 시간, 노동, 서비스, 감정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이 법칙은 어느 세계에서나 적용되는 것이지만 일본의 그 특유의 과도한 서비스나 감정 표현을 생각해보면 이 나라에서는 그 책임은 훨씬 클 것이다. 어른이 되어라 신지… 저는 일본에서 어른이 되는 것이 무섭습니다~~
참고로 이 모든 이야기는 뇌내망상이며 난 일본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냥 최대한 모델을 만들어본 것이다.